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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Nov 23. 2021

창문을 넘어 바라본 죽음

London Life

창문을 넘어 바라본 죽음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와 교류가 없는 곳이 앞옆집이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할아버지는 아파 누워있었고, 나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젊어서 꽤나 미인이었던 듯해 보이지만, 남편 병시중으로 인상이 약간 신경질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 집에 차 한 대가 다급히 도착했다. 차에서 말끔한 양복의 건장한 남자와 오피스룩을 입은 여성이 내렸다. 남자는 트렁크에서 이것저것을 챙겼는데 그중에는 작성해야 할 서류뭉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할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돌아 가신 모양이다. 이런 직감은 내가 잘 안 틀린다. 그렇다면 방금 도착한 사람은 코로너(Coroner, 시신검시관)와 그의 비서가 분명하다. 바이러스 코로나와 검시관 코로너는 ‘아’ 다르고 ‘어’ 다르지만, 어원은 같다. 모두 크라운(crown, 왕관)에서 나온 말이다. 바이러스는 왕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코로나고,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은 왕의 일을 하고 있어서 코로너다. 코로너가 죽음을 확인해줘야 장례 프로세스가 진행된다.


코로너가 도착한 지 30분 후인 아침 10시 30분에 아들이 도착했다. 아들은 곤색 양복에 푸른색 계통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며느리는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9살 11살로 보이는 손자 둘이 차에서 내렸는데, 모두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의 사망 시간은 8시 30분 이후라고 추정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죽음을 모르고, 학교에 갔다가 학교에서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이 틀림없다. 죽음의 시간을 이렇게 과학적으로 추론하다니 나도 코로너 자질이 있다.



잠시 후에 딸이 도착했다. 코로너와 코로너의 비서, 아들 내외와 손자 둘, 딸 내외는 문 밖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로너 여비서는 쾌활한 성격인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고 틈만 나면 웃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지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창 밖으로 보이는 인물 중에 슬퍼 보이는 사람은 9살 손자뿐이었다.


11시가 되자, 동네 교회의 성직자 두 명이 도착했다. 이 지점이 가장 이상한 부분이다. 만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간이 8시 30분 이후라면, 동네 성직자 두 명이 11시에 집에 오는 것은 영국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30분 정도 한눈을 팔았다. 그 사이에 검은색 영구차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 이쯤 되면 내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영국의 장의 회사가 동네마다 있지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는 없다.


장의 차량 안에는 묵직한 관이 있었고, 관 위에는 흰색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관이 집에서 나왔는지 영구차에 원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았을 때, 사망 시점에 대한 나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그렇다면 처음 도착한 사람도 코로너가 아니고 첫째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시종일관 밝은 표정인 여성은 코로너 여비서가 아니라, 첫째 며느리일 가능성이 높다.


성직자가 맨 앞에 서고, 영구차가 중간에 서고, 가족이 맨 뒤에 섰다. 이들은 걸어서 동네 교회까지 갈 요량으로 보였다. 그 과정에서 옆집 소피아 할머니가 문 밖으로 나왔다. 소피아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사태 전개에 당황스러워하며, 몸에 성호를 그었다. 앞옆집 할머니에게 말을 걸거나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가려던 길을 갔다. 그렇다고 두 할머니가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둘은 일요일 아침마다 같이 교회에 갔다가 다정하게 같이 돌아오는 사이다.


나는 먼발치에서 간소한 장례 행렬을 따랐다. 교회는 전철역 옆에 있었고, 나도 전철을 타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신 것인가? 저녁 늦게 집에 오면서 본 앞옆집은 평소와 같았다.


동네 왓츠앱 채팅방에는 크리스탈 팰리스 공원의 크리스마스 장식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동네 할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동네에서 반장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아저씨에게 안부를 물었다. 자기는 잘 있으며,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달리기를 하는 데 날씨가 꽤 춥다고 했고, 오늘은 그 할아버지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했다. 언제 돌아가셨냐고 묻자 3주 전이라고 답했다.


앞옆집 할아버지는 3주 전에 돌아가셨다. 3주 동안 동네 단톡방에서는 동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할머니의 행동도 평소와 같았기에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 길이 없었다. 동네 토박이들은 알았던 모양이고, 장례식에도 초대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장례식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세 시간가량 창 밖을 통해 장례 과정의 일부를 지켜보았다.


시신은 3주간 병원에 있었고, 장례 예배를 위해 자신이 머물었던 동네에 마지막으로 왔다. 예배 후 화장 또는 매장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85%의 높은 확률로 화장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80%의 확률로 화장 후 유골을 인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장보다는 화장을, 그리고 화장 후에 유골을 수습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영국 장례문화다.



지난주에 코톨드 갤러리에 갔었고, 성화 여러 점을 인상 깊게 보았다. 십자가에서 수습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여러 점 있었고, 천국에서 왕관을 받는 성모 마리아 그림도 몇 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습하는 사람들에게 슬퍼하는 모습은 없었다.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예수님의 지인은 평상시와 같은 표정이거나 일부는 오히려 밝은 표정이었다. 당시 유대인의 장례 풍경이 그러한 것이었는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당시 유럽의 장례문화가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에게 죽음은 슬픔만은 아니다.


마침 그제는 온통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멕베스 오페라를 보았고, 어제는 창문을 넘어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며,  우리 곁에 있다. 하여 죽음은  장엄하지만, 우리는 평상시와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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