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unfair와 unlucky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이 불공정unfair하다고 느꼈다. 나이가 들면서는 세상 일이 불공정보다는 불운unlucky에 가깝다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이 보수화의 한 현상일 것이다.
가장 큰 글로벌 스포츠 행사 중의 하나인 F1 파이널이 아부다비에서 개최되었다. 마지막 레이스까지 메르세데스팀의 루이스 해밀턴과 레드불팀의 맥스 베르스타펜이 동점을 기록하고 있어서 F1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파이널이 진행되었다. 24세의 베르스타펜이 뜨는 해고, 36세의 해밀턴은 지는 태양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에 베르스타펜의 우승을 점치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았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예상과 달리 해밀턴의 주행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주행이었다. 베르스타펜에게는 기회가 없어 보였다. 마지막 5바퀴를 남기고 1위와 2위의 격차는 11초였다. 2위인 베르스타펜이 소프트타이어로 교체했기 때문에 한 바퀴에 1초 정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한 바퀴를 덜 돌은 다섯 대의 차가 1등과 2등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해밀턴과 베르스타펜의 차이는 더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베르스타펜의 신기의 주행술로 감속 없이 다섯 대 차량을 추월한다고 해도 해밀턴은 6초 이상의 차이로 여유 있게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섯 바퀴를 남기고 후미에서 차량이 충돌하여 안전주행모드(safety car)가 출현했다. 모든 차량은 앞차를 추월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행을 해야 했다. 결국 1위와 2위의 11초의 간격은 없어졌다. 그렇게 네 바퀴를 돌았고,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안전주행모드가 사라졌다. 경기위원장은 1등과 2등 사이에 다섯 대의 차량이 먼저 가도록 허락하여,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놓고 1등과 2등의 대결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소프트타이어를 장착하고 있는 베르스타펜이 해밀턴을 추월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으로 8연패를 이어오던 메르세데스의 연승 행진이 중단되었다. 혼다가 메르세데스를 이긴 것이다.
58바퀴 경주 중에 사고가 발생해 두 번의 안전주행모드가 발동되었는데, 모두 해밀턴에게 손해로 작용했다. 해밀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운unbelievably unlucky했다. 문제는 이게 과연 불운한 것뿐이냐는 것이다.
메르세데스팀은 즉각 이의를 제기했고, 우승팀을 확정하기 위해서 4시간이나 격론이 벌어졌다. 레이스 규정에 의하면 안전주행모드가 해제될 때는 바퀴수를 덜 돌은 차를 먼저 보내주고 레이스를 재개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경기위원장은 해밀턴과 베르스타펜 사이에 있는 차량 다섯 대만을 먼저 보내주고, 나머지 차량은 보내주지 않았다. 즉 해밀턴과 베르스타펜 사이의 간격만을 좁혀주고 경기를 재개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다.
그러나 경기위원회 측은 F1 경기가 경기위원장의 폭넓은 재량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두 번째 문제는 경기위원장의 재량이 중간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두 바퀴를 남겨 놓았을 때에 경기위원장은 안전주행모드가 해체될 때 모든 차량은 현재 위치에서 레이스를 재개한다고 말했다. 즉 해밀턴과 베르스타펜 사이에 있는 다섯 대의 차량이 있는 그대로 경기가 재개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고 번복되었다. 경기위원장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된다고 해도 그가 결정을 번복할만한 상황 변화가 있었냐는 것이다. 영국의 해밀턴 팬들은 분노의 포스팅과 댓글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 빨리 분노의 댓글이 올라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새로운 왕좌에 등극한 24세의 챔피언은 찜찜한 대관식을 하게 되었지만, 해밀턴은 베르스타펜을 안아주고 축하해 주면서 스포츠맨십의 모범을 보였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해밀턴은 트랙과 트랙 밖에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메르세데스팀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한 것이 아니고 불공정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메르세데스팀은 이것을 스포츠 중재재판까지 끌고 갈 요량이다. 레드불팀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법적인 싸움에서도 메르세데스팀에 지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결국 세기의 스포츠 중재 재판이 벌어질 것이다.
정유라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도 실력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은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보다는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턴의 문턱도 바라볼 수 없는 학생은 아버지 덕에 쉽게 인턴 자리를 구할 수 있는 학생에 비해 불운하다.
정유라가 최순실을 어머니로 둔 것은 행운이지만, 이화여대 학사규정을 무시하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공정한 것이다. 정유라가 실력이라고 말한 것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행운을 만드는 실력이 아니라 불공정을 만드는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대학교 교수인 것은 행운이나, 어머니가 총장의 직인을 가지고 딸에게 표창장을 준 것은 불공정한 것이다. 아버지가 인턴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행운이지만, 인턴을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하거나, 대충해 놓고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공정한 것이다.
자신의 불공정은 생각하지 않고 불운만 말하는 것이 최순실적 화법이라면, 다른 사람은 더 불공정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불공정을 대수롭지 않게 나타내 보이는 것은 조국식 화법이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지점, 그 지점을 잘 알고 있어야 이번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게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런 것이다. 규칙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불공정이냐 공정이냐의 잣대도 사람이 만든 것이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불운이나 불공정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넓게 보면 불운이나 불공정이나 다 불운이다.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은 내가, 대선판에 있지 않은 내가 행운아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불운도 행운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불운이 또 행운된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행운의 여신은 굶주린 독수리와 같아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 날 공격할 수도 있지만, 나와 마주하고 있는 나의 라이벌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무운을 빌며 또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