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설날에 읽은 이야기, H is for Hawk
템즈 강에서 로잉을 마친 둘째를 데리고 집에 왔다. 큰 아이 줌 인터뷰가 끝나지 않았음을 걱정하여 노크를 망설이고 있었다. 옆옆집 할머니는 마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How are you?라는 인사를 교환하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 이런 때는 무엇이라도 하늘을 날고 있어야 좋다. 그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까마귀 한 쌍이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빠르게 날고 있었다. 저 먼발치 하늘에서는 이름 모를 새가 유유히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참 고마운 것이 새다.
한 참이 지난 것 같다. 이만하면 되었지 싶었다. 할머니가 집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아이의 줌 미팅이 끝났을 수도 있다. 고개를 내려 시선을 지상으로부터 1미터 80센티미터 지점으로 내렸을 때는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 이미 벌어져 있었다.
내가 눈을 피했던 할머니가 내 눈 3미터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그 책을 내게 줄 모양이었다. 그녀가 저 책을 내게 선물한다면, 근데 왜? 그래도 준다면, 나는 어떤 답례를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막막했다. 이 장면이 더욱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아주 높은 확률로 저 책을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해에 나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반경 100km 안에서 자기가 읽은 책 보다 쓴 책이 많은 사람은 내가 유일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반경 100km라고 하면 그 안에는 케임브리지도 있고, 옥스퍼드도 있으며, 칼 마르크스의 무덤도 있고, 찰스 다윈의 집도 있다. 나는 지난해에 책을 1과 1/16권을 썼지만, 내가 읽은 책은 어느 책의 3/16 정도였다.
“우리 딸이 책 하나를 보내줬는데, 이게 한국말로 된 책이야. 책 주문을 실수로 한 모양인데, 이것을 다시 반송하고 영어로 된 책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번거로운 일이 될 거야. 그래서 이 책을 너한테 주려고 이렇게 가져온 거야!”
“이 책의 저자가 당신 딸인가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딸이 이 책을 읽고 너무 감동해서 우리에게 보내 준 거야.”
“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어 볼게요.”
급하게 마무리했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질문이 필요했지만, 나는 질문을 하지 않고, 책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딸이 한국에 살고 있는지 또는 한국과 관련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에 살고 있거나 한국과 관련한 일을 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쉽게 설명될 수는 없다.
영국의 젊은 여성이 책을 읽고 감동하여 그 책을 어머니에게 보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마존에서 영어 책을 주문하면서, 그 책의 오리지널 영어본의 아닌 한국어 번역본으로 주문할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인가? 어마어마하게 낮은 확률로 우리 동네에 도착한 이 책은 마지막 단계에서 1/2의 확률을 뚫고 내게 전달되었다. 만일 이 책이 와이프에게 전달되었고, 와이프가 내게 그런 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었다면 나는 믿지도 않았을 것이고,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놀라운 확률이 신기하여 이 책을 1/16 정도만 읽어 볼 요량으로 책을 폈다가 나는 455페이지짜리 책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 제목은 이랬다.
H is for Hawk. 우리말로는 [메이블 이야기]다.
벽난로 앞에서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본 와이프가 당황하여, 책 읽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와이프는 이 책이 어떻게 난 것이며, 책 내용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을 작정이다.
이 책은 헬렌 맥도널드라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튜터가 아버지를 잃고 상심하다가 매를 키우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헬렌과 메이블이라는 이름의 헬렌의 매, 그리고 헬렌보다 70년 전에 매를 키우며 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 화이트와 고스라는 이름의 매에 관한 이야기다.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의 상징인 매와 인간이 교감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매와 자신과의 끈을 생각하고, 오래전에 매를 길렀던 화이트라는 사람과의 끈을 생각하고, 그 매와의 끈도 생각한다. 자신과 아버지의 끈을 생각하고, 인간과 자연의 끈을 생각하고, 시간과 역사에 대한 끈을 생각한다.
오늘은 끈을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우리의 명절 설이다. 그리고 나는 ‘끈은 결국 없어짐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의 내 쓸쓸함을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