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백조의 호수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
런던에서 만난 친구가 SNS의 유용함에 대해 포스팅했습니다. 저는 어제 ‘백조의 호수’를 보고, 관람기를 포스팅했는데요. 그곳에 카자흐스탄 친구 무랏(Murat)이 너무 좋은 댓글을 달아 주었네요. 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 준 친구에게 감사합니다.
러시아의 독립 방송사인 도즈디(Rain, 비)라는 방송국이 푸틴의 ‘특별 군사 작전(?)’을 침략이라고 표현하자, 러시아 정부는 이 방송사를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위협을 느낀 일부 직원은 해외로 출국했고, 방송국은 3월 3일에 ‘백조의 호수’를 마지막으로 송출했습니다. 왜 ‘백조의 호수’였을까요?
1982년에 공산당 서기장인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러시아 방송은 그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은 채, ‘백조의 호수’를 방송했습니다. 차기 후계 구도가 결정되기 전까지 어떠한 뉴스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함부로 떠들다 어떤 화를 당할지 몰랐으니까요. 이후 안드로포프가 죽었을 때도, 체르넨코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년 고르바쵸프를 실각시키기 위한 공산주의자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도, 방송은 정규방송을 멈추고 ‘백조의 호수’만을 계속 틀었습니다. 쿠데타 주모자는 후에 ‘백조의 호수’를 방송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고르바쵸프의 죽음을 암시했고, 고르바쵸프 지지자들을 단결하게 만들었습니다.
소련 시기에 TV에서 백조의 호수를 방영한다는 것은 정치적 격변의 신호며, 리더십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1877년에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발레는 퇴폐적이라고 하여 사라질 뻔하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공산당은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좋아했지만, ‘백조의 호수’ 스토리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예술은 선악의 대결에서 선이 이기고, 밝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 시기에 ‘백조의 호수’는 해피엔딩으로 바뀌었고, 스탈린과 후루시쵸프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는 수십 번씩 ‘백조의 호수’를 봤습니다. 외국에서 귀빈이 올 때마다 백조의 호수를 보도록 했습니다. 소련 시기 미국 대사였던 톰슨은 7년의 재임기간 동안 손님과 함께 무려 132회나 관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리지널 스토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유리 그리고리비치의 노력으로 소련이 망한 후에 다시 오리지널 스토리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깨진 꿈으로 인해 울고, 잃어버린 기회 때문에 슬퍼하고, 이루지 못한 계획 때문에 한탄한다’라는 의미를 가질 때에 비로소 러시아 정치에 더 어울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왜 그리도 많은 러시아 관객이 ‘백조의 호수’를 찾았는 지를 알 것도 같습니다. 로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이 마무리되기 전에, 어떻게든 표를 구해서 다시 한번 보러 가야겠네요. 러시아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