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Apr 20. 2020

얼 그레이, Twinings 그리고 선거법 개정

런던 명소


홍차 중에 Earl Grey가 있다. 얼 그레이는 발음하기 편하고 기억에 잘 남는 이름이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을 때는 ‘얼 그레이 주세요’라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얼 그레이를 마시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다는 것이다. 영국의 선거제도를 연구하면서 알게 되었다.


얼 그레이는 1832년에 선거법 개혁을 주도한 영국의 총리였다. 대영제국의 총리다 보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차(Tea) 선물을 많이 받았고, 차 애호가였다. 얼 그레이 집에는 차를 전담하는 중국인이 있었는데, 그가 베르가못 오일을 가미한 홍차를 만들었다. 그렇게 얼 그레이 차가 탄생했다.

베르가못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우리나라의 귤과 유사하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국가다. 위도도 비슷한데 기후는 많이 다른지 과일이 다르다. 이탈리아에는 헤이즐럿이 나고, 한국에는 밤이 난다. 한국에 귤이 난다면, 이탈리아에는 베르가못이 난다. 베르가못이 이탈리아에 있는 귤이라고 하면, 중국에 얼 그레이와 유사한 홍차가 있었을 리가 없다. 얼 그레이 집에서 일하던 중국인이 물에 있는 석회 냄새를 없애기 위해, 베르가못 오일을 첨가해 본 것이다. 어쩌면 당시에 중국에서는 유자나 탱자 향을 넣은 홍차가 만들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최초로 얼 그레이를 상업화 한 곳은 Twinings다. 트위닝스는 1706년에 시티 오브 런던에 Tea Shop을 냈다. 영국 대법원 옆에 있는 가게는 지금도 그 위치에 그대로 있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다. 트위닝스의 로고는 전 세계 모든 브랜드 로고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영국 법원 건물


Earl은 백작이다. 총리를 한 찰스 그레이의 아버지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 작위를 받은 것이다. 귀족 타이틀은 왕위처럼 한 사람에게만 세습된다. 지금은 7대 얼 그레이가 영국의 어딘가에 살고 있다.

1930-34년 총리였던 얼 그레이가 통과시킨 선거법 개정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당시만 해도 선거구가 아사리판이었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구 구성이 크게 변했지만, 선거제도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골 지역에는 유권자가 12명인 선거구가 있었고, 도시에는 유권자가 12 000명인 선거구가 있었다. 천배 가량 차이가 났다. 새로운 산업 도시 중에는 아예 선거구가 없는 곳도 있었다. 썩은 지역구를 없애고 새로운 지역구를 만드는 법안은 큰 저항을 불러왔다. 야당인 토리당과 토리당이 지배하고 있던 상원이 강력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등에 업은 얼 그레이의 노력으로 선거법 개혁이 이뤄졌다.

얼 그레이 총리


얼 그레이의 개혁으로 선거구 불평등이 해소되었고, 유권자도 크게 증가했다. 유권자가 60% 증가하여 40만 명이었던 유권자 수가 65만 명으로 증가했다. 10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신발 제조공, 홍차 소매상도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10파운드는 꽤 많은 돈이었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노동자 계급에는 여전히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얼 그레이의 개혁은 노동자들을 각성시켰다. 이후 노동자들의 투표권 요구가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차티스트 운동이다.


런던 관광객이라면 시내 한복판에 있는 Twinings에서 얼 그레이 차를 사볼 것을 추천한다. 세계 어디서든 얼 그레이 차를 테이블에 놓고 선거법 개정과 차티스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면, 얼 그레이 맛이 한층 좋아질 것이다. 선거법 개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힘이 빠질 때마다 얼 그레이를 마신다면,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마라톤과 눈물은 필요했나? -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단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