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영국 정치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은 안철수의 마라톤이며, 가장 안쓰러운 장면은 심상정의 눈물입니다. 선거가 시작되면서 안철수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이 민주당보다 정당 득표수가 높았던 기억 때문일 겁니다. 특히 이번에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도입되었으니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정의당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진보정당 역사상 최대 성과입니다만, 위성정당이란 꼼수 앞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가요? 이 모두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비롯된 겁니다. 선거제도의 역사와 함께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영국에서 시작된 국회의원 선거
의회 민주주의의 역사가 8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귀족과 성직자가 왕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가 세상에 나온 해인 1215년을 기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마그나 카르타를 만들어 낸 귀족과 성직자의 모임이 의회가 됩니다. 귀족과 성직자 이외에 추가로 선출직 국회의원을 받아들인 것은 1265년부터입니다. 국회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기사(knight) 중에 선발했습니다. 칼싸움을 잘하는 순서로 선발한 것은 아니고, 한 지역에서 두 명을 투표로 선출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가 아니고, 중선거구제로 실시되었습니다.
2) 지금의 영국 선거제도
현재 영국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650개 지역구에서 한 명을 선발합니다. 소선거구제가 가장 역사가 깊고 기본적인 선거제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800년 역사의 영국 선거제도에서 소선거구제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1884년이며, 지금과 같이 전면적으로 실시된 것은 1948년입니다. 소선거구제가 나쁜 줄 알면서도 바꾸기 싫어하는 영국인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 오래된 전통은 아닙니다.
3) 소선거구제의 단점
소선거구제의 단점은 사표의 발생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령의 노인이 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노인들 중에 70년 이상 투표를 하면서 한 번도 당선자를 내 본 적이 없는 유권자도 많다고 합니다. 2015년 선거에서 UKIP당은 전국적으로 4백만 표를 득표했지만, 650명의 국회의원 중에 단 한 명을 당선시켰습니다. 말도 안 되죠? 1974년 선거에서 Liberal Party는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서 선전하면서 19%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2%만을 차지하는데 그쳤습니다. 소선거구제의 단점입니다.
4) 비례대표제의 장점
소수파가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선거의 역사와 늘 함께한 문제입니다. 영국의 정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1861년에 비례대표의 도입을 최초로 주장했습니다. ‘다수는 다수를 대표하고, 소수는 소수를 대표한다.’ 다수가 다수의 국회의원을 가지고, 소수는 소수의 국회의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까지 세상을 지배했던 '다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다수주의(majoritarianism)에 경종을 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도 다수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로 많은 나라가 앞다투어 비례대표제를 도입합니다.
5) 비례대표제의 단점, 소선거구제의 장점
비례대표 제도의 단점은 국회와 국민의 연결 고리가 약하다는 겁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비례대표 후보를 선정할 때 국민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열린민주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선정하면서 보여준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투표 시에 선호하는 비례대표 후보를 유권자가 기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국회와 국민을 연결하는 측면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대표성은 취약합니다. 한 지역을 한 사람이 대표하는 제도가 책임성 측면에서는 가장 뛰어납니다. 영국은 지방 선거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지역 의회는 지역문제만을 다루기 때문에 유권자와 의회 간의 거리감이 크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6) 다양한 제도의 실험
지역구 대표성의 장점을 살리고 사표 방지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누적 투표제, 선호 투표제, 결선 투표제 등이 시도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지난 800년 동안 실제로 시행되었던 투표 방법은 12개나 됩니다. FPTP(SM), FPTP(MM), LV, CV, STV, AV, AV+, SV, List PR, List PR(open), MMP, AMS. 이걸 다 설명하려면 날이 샙니다. 이중 다섯 개 제도를 지역 의회, 기초단체장, 국회의원, 유럽의회 의원 선출에 채택하고 있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리나라가 채택한 제도는 AMS+MMP라고 할 수 있습니다. AMS(Additional Membership System)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제도를 일컫는 말이며, MMP(Mixed Member Proportional Representation)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7) 제도 개선을 위한 시도
2011년에 영국에서는 소선거구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대안투표제(Alternative Vote)가 국민투표에 붙여졌습니다. AV는 투표용지의 후보자 이름 옆에 선호도 등수를 매기는 것이다. 1번 선호도에서 50%를 넘는 후보자가 없을 경우에 꼴찌 후보자 한 명을 제외합니다. 제외된 후보의 표를 2번 선호도에 따라 남은 후보들에게 재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꼴찌 후보자를 한 명씩 제외하면서 50% 득표자가 나타나면 당선자가 나옵니다. 국민투표에서 AV제도는 반대 68%, 찬성 32%의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었다. 복잡한 것은 싫다는 겁니다. 조금만 따지고 보면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영국 사람들 머리가 나쁜가요? 2011년 국민투표는 ‘선거는 복잡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영국에서 2017년에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국민청원이 진행된 적이 있다. 청원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103 495명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0만명 이상 참여하는 국민청원은 일 년에도 수십 건이 될 겁니다. 영국 국민들은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알지만, 존속을 바랍니다.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가장 간명하기 때문입니다.
8) 선거제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은 여러 선거제도를 실험한 끝에 소선거구제에 정착했고, 스위스는 완전한 비례대표제를 선택했습니다. 다양한 제도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나라마다 특성에 맞는 제도를 선택하면 됩니다. 선거제도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영국의 집권 보수당은 비례대표적 요소를 투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제3당인 Liberal Democrats는 도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동당의 경우 특별한 입장 없이 찬성과 반대가 반반입니다. 보수당도 항상 반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초 노동당의 기세가 무서웠을 때, 모든 의석을 노동당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싶었죠. 선거제도가 요망해서 자신들의 유불리를 철저하게 따집니다. 그래서 합의에 의한 제도 변경이 어렵지요. 어려운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국민적 동의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습니다.
9) 20대 국회라는 특별한 상황
20대 국회는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라서 개정하고 싶은 법률이 많았습니다. 민주당은 과반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정의당과 국민의당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21대 국회는 전혀 다릅니다. 집권 민주당은 180석이 넘는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미통당이 반대하는 선거법 개정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집권 여당과 거대 야당이 소수당에 유리하게 바꿔줄 이유가 없습니다. 여론도 문제입니다. 여론은 소수 정당의 편일까요?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 위성 야당에 투표한 비율이 33.8%, 거대 위성 여당에 투표한 비율 33.3%며, 위성 여당보다 더 위성 여당인 열린민주당에 투표한 비율이 5.4%입니다.
10) 한국 선거제도의 특별한 점
우리나라 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혼합된 형태며, 국회의원을 한 번에 바꾸는 동시 선거제입니다. 253석을 각 지역에서 선출하고, 47석을 비례대표로 선출합니다. 정당투표에서 얻은 투표수로 비례대표 의원을 선발하는데,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수가 감안이 되는 방식입니다. 지역구 투표와 정당 투표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투표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개의 선거가 독립적으로 시행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지역구 투표가 주된 투표가 되고, 정당 투표가 부속 투표가 됩니다. 반장 선거를 하고, 다음에 부반장 선거를 하는 격입니다. 남학생이 반장이 되면, 부반장은 여학생에게 표가 갑니다. 범서방파가 회장을 하면, 칠성파가 부회장을 맡아야 합니다. 지역구 투표에서 고민 끝에 민주당을 선택한 사람은 정당 투표에서는 다른 당에 투표를 하고 싶은 견제 심리가 발동합니다. 이런 현상은 부동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1) 안철수의 착각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20대 국회의원 정당투표에서 26.74%를 득표했고, 민주당은 25.54%를 득표했습니다. 지역구 후보의 경쟁력에서 민주당에 뒤졌지만, 정당 지지에서는 국민의당이 앞섰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보다는 안철수를 지지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반장 선거에서 민주당을 뽑았으니 견제심리로 부반장 선거에서 국민의당에 표를 준 것인데 그걸 애써 모른척합니다. 그래서 다시 선거 무대에 나왔고, 선거운동이 아닌 마라톤을 했습니다.
12) 정의당의 오해
정의당은 20대 국회에서 7.23%를 득표했는데, 21대 국회에서는 9.67%를 득표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고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면, 최대 29석까지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대 29석이지만, 47석에 한정해서 배정한다면 16석이 비례대표 의석으로 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첫째 오해는 9.67%를 온전히 자신들의 정당 지지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이 누린 부반장 효과를 이번 선거에서는 정의당이 누린 겁니다. 체감으로는 정의당 지지율은 20대보다 21대에서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20대에서 7% 대의 지지를 받았다면, 21대에서는 6% 대 지지를 받았을 겁니다. 6% 지지면 그래도 최대 18석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정의당은 여전히 억울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오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눈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문제점 여섯 가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선거구제의 장점과 비례대표제의 장점을 혼합한 이상적인 제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0석만 연동형으로 배분했기 때문에 제도의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연동형 의석수가 늘어날수록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지역구 투표의 중요성이 감소합니다. 몇 개 지역구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전체적인 결과가 비슷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계산 방식이 복잡해서 일부 유권자는 제도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투표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셋째, 투표에 왜곡이 일어납니다. 투표 제도를 완벽히(?) 이해한 유권자들은 전략적 투표를 하게 됩니다. 좋게 말해면 전략적 투표고, 나쁘게 말하면 이상한 투표입니다. 21대 선거에서 미래통합당이 지역구에서 크게 부진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소수당은 피해를 봅니다. 소수당에게 제일 좋은 결과는 민주당도 120석을 얻고, 미통당도 120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소수당에게 배정되는 의석수가 늘어납니다. 비례대표 배정을 한 석이라도 더 배정받기 위해서 지역구 투표에서 정책 연대를 하는 정당의 후보가 아닌, 적대적인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넷째, 정당 내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합니다. 21대 선거에서 정의당의 하위 순번 비례대표 후보들은 심상정 후보의 낙선을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여영국 후보나 이정미 후보의 당선은 상상하기도 싫었을 겁니다. 비례후보와 지역후보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하게 됩니다. 속마음은 그럴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충돌이 일어날까 싶으시죠? 선거에서는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1996년 뉴질랜드의 웰링턴 센트럴 지역구에서 자기당 후보를 지지하지 말자는 선거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후보 중에 하나가 비례후보 후순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역구 국회의원의 독립성이 약화됩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지역구 후보 한 명의 당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역구 당선 가능성이 높지만 소신 행보를 일삼는 후보를 공천하지 않게 됩니다. 정당 대표의 권한이 강화되고 개별 의원의 독립성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덩달아 지역 대표성이 약해집니다.
여섯째, 위성정당이 출현합니다. 미래통합당만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선거법을 개정하여 위성정당 출현 방지책을 보강할 수 있습니다. 지역구에 후보를 내면서 비례대표에 후보를 내지 않는 정당이 없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열린민주당과 같은 정당의 출현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전체 의석 중에 10%인 30석을 놓고 벌인 게임에서도 이 정도 난리가 났습니다. 연동형 비례대표 의석수가 확대되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연동형 비례대표제(MMP)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주요 국가 중에는 독일만이 채택하고 있으며, 몇몇 나라는 채택했다가 포기한 제도입니다.
14) 새로운 선거제도의 필요성
현 선거제도는 개정되어야 합니다. 정의당은 연동형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정당에서 선거법 변경에 동의해 주지 않습니다. 비례대표를 늘릴 수 있습니다. 지역구 의석을 200석으로, 비례대표를 100석으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비례대표 100석은 연동성을 포기하고 단순 비례대표 제도로 가야 합니다. 다만 비례대표 투표가 지역구 투표의 부속 투표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투표가 되도록 투표일을 다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4년마다 진행되는 올림픽과 월드컵이 2년마다 교차하듯이 지역구 투표와 정당 비례대표 투표를 교차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15) 인물이 없는 정치는 없다
국회의원은 대표자입니다. 결국 누가 국민을 대표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수당에는 좋은 인물이 몰리지만, 좋은 인물이 많아도 다수당이 됩니다.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100석으로 하고, 비례대표에 연동형을 없앤다고 하면, 정의당은 몇 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합니까? 6명, 7명? 어차피 같습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인물입니다.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물을 키우려는 노력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정치는 혼자 하는 마라톤이 아니고, 인물들이 함께 모여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심상정 의원은 불완전한 제도에 눈물을 흘렸지만, 인물을 키우지 못한 자책으로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습니까?
마라톤 없고, 눈물 없는 다음 선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