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황새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는 뱁새의 상황, 영국
한때 증권사 시황지도 써본 사람으로서, 지금은 런던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경제 변수는 거시경제 전문가들이 잘 알 것이고, 현지 보도를 정리하여 기사화하는 것은 기자들이 잘할 것이고, 살면서 느끼는 경제 사정은 너무 지엽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현재 영국 사정이 매우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 특별한 정도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정리해 볼 필요는 있겠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있고, 전쟁으로 인한 자원 가격 상승이 있고, 달러 초강세로 여러 나라 환율이 불안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어떠한 특별한 사정이 있을까?
먼저 이자율 문제다. 미국을 황새라고 한다면, 영국은 뱁새라고 할 수 있다. 황새가 빅스텝으로 나아가는데 뱁새가 종종걸음을 치면 따라갈 수가 없다. 미국은 5월에 0.5%, 6월에 0.75%, 7월에 0.75% 이자율을 올렸고, 8월 여름 한 달을 휴가로 쉬고 다시 9월에 0.75% 이자율을 올렸다. 불과 얼마 전에 제로 수준이었던 미국의 이자율은 3.25% 수준까지 올랐다. 영국은 찔끔찔끔 올리더니, 9월에는 여왕 서거로 시기도 늦어졌고, 황새의 빅스텝을 보고도 0.5%만 올렸다. 영국 이자율은 2.25%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영국의 금리차가 1%에 육박한다.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뉴욕과 런던을 황새와 뱁새가 노니는 논으로 비유한다면, 둑이 없는 논과 같다.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논바닥을 낮추는 것이다. 물은 거의 노타임에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뱁새는 뭐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황새의 큰 걸음을 따라가야 한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영국의 특별한 사정이라고 하면, 뉴욕이라는 논과 런던이라는 논은 딱 붙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환율이다. 미국의 논바닥이 더 낮아지면서 물은 그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달러 대비 파운드 환율은 역사적 최저 수준에 도달해 버렸다.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그렇게 비극적인 수준은 아니다. 영국 교민은 파운드화와 원화 비율을 편의상 1:1500으로 계산하는 것이 최근 몇 년의 버릇인데, 현재는 1:1598로, 원화 입장에서 아직 파운드화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해답은 단순하다. 어떻게든 황새 빅스텝을 따라가면 된다. 이자율을 올리면 된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뭔가가 찢어질 수밖에 없다. 찢어지는 것은 주택시장이다. 금리를 올리면 모기지를 쓰고 있거나 은행 대출을 쓰고 있는 가계에 부담이 된다. 영국에서 모기지 이용 건수는 830만 건이다. 영국의 모기지는 시작할 때 5년 고정 금리로 시작하고 그 후에 금리가 변동하는 상품이 주를 이룬다. 금리가 변동하기 전에 다른 모기지로 갈아타면서, 일정 기간 금리를 추가로 고정시키려고 한다. 현재 기준으로 당장 이자율 상승에 노출되는 대출은 전체 모기지 중 1/4 정도인 2백만 건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다.
모기지의 더 큰 문제는 금리가 단기적으로 많이 올랐지만, 추가적으로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현재 금리가 2.25%지만 내년 봄까지 5.8%까지 오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현재 금리로 첫 5년 동안 고정 금리를 주기 어렵다. 고정 금리 기간을 가능한 줄여야 하며, 대출 금액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현재 은행은 대출자에게 금리 7%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기를 요구한다. 결국 신규 모기지 건수가 급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주택 가격은 하락한다. 올해 주택 가격은 지금까지는 큰 하락이 없었지만, 이제는 10%-15% 하락은 불가피하다. 모기지뿐만 아니라 개인 대출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금리 상승은 가계의 가처분 소득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비율은 한국이 영국보다는 조금 더 높다.) 이자율 상승은 피할 길이 없고 대출이 많은 사람은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전체적으로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 비슷하다. 다만 영국이 조금 더 괴로워 보이기는 한다.
첫째, 영국은 코로나 피해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컸다. 코로나로 인해 노동시장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나라보다 과감한 재정정책을 폈다. 코로나가 끝나면 적극적 재정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여 빠르게 경제가 반등해야 하는데, 코로나가 끝날 무렵에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소비심리는 위축되었고, 가스 및 원유 가격 상승으로 물가는 급등했다.
둘째, 영국은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나라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나라다. 급격한 자금 유출에 대비하여 외환보유고를 필요 이상으로 쌓아 놓지 않는다. 영국 경제규모는 세계 5위권이지만, 외환보유고는 세계 18위 정도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금도 필요 없다고 하여 팔아 버리고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 때문에 외환을 많이 보유한 나라 입장에서는 파운드가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셋째, 제조업 기반이 약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제조업 강국은 환율이 하락할 경우 수출 경쟁력이 빠르게 부각되어 달러 공급이 늘어난다. 원화가 급격한 약세를 보이면 삼성전자의 수출이 좋아져 달러 공급이 빠르게 증가한다. 산업구조상 영국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네째, 정치와 경제 정책에 있어 리더십이 약화되어 있다. 새로 들어선 리즈 트러스 내각은 국민과 언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놓은 정책마다 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그러한 반대를 극복할 정치적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투자심리나 소비심리가 살아나기 어렵다. 보리스 존슨은 전시형 지도자다. 당장 내일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상한 안정감을 느낀다. 난파하는 배에 보리스 존슨이 선장이라면 리더의 입으로 어떻게라도 둥둥 뜰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리더십은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 지금은 경제 전쟁이고, 실제 전쟁 중인데, 전쟁에 맞는 리더십이 필요했다. 총리 교체는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영국의 파운드화가 약해 보이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1992년에 있었던 조지 소로스의 파운드화 공격 때문이다. 영국이 약점을 보이면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이 또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조지 소로스 펀드보다 더 큰 헤지 펀드도 많다. 1992년은 유럽이 ERM이라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환율 관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환율을 일정 밴드 안에서 관리하도록 유럽 국가들이 약속한 시스템이다. 그러한 비시장적 제도가 인위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상황에서 제도의 약점을 소로스가 공격한 것이다. 헷지펀드는 비합리적인 제도를 공격하는 데에는 선수지만 시장을 공격하는 것은 주저한다. 시장은 그 어떤 제도보다 탄력적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파운드가 지금 어느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국의 위기는 과장되었다. 영국은 황새의 빅스텝만 따라가면 된다. 그 과정에서 서민의 이자 부담이 가중 되고, 일부는 모기지 부담을 지키지 못해 집을 빼앗기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만일 뭔가가 찢어지는 것이 두려워 황새의 빅스텝을 따라가는 것을 주저한다면, 일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