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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May 19. 2020

Seven Sisters에 다녀오다.

런던 라이프

Seven Sisters에 다녀오다.


  
Seven Sisters 다녀왔다. 런던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 시간 반을 가면 된다. 오랜만에 보는 파도가 좋았다. 파도에 나뒹구는 검은 돌의 달각거림이 좋았다. 먼길을 날아와 하얀 절벽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가 좋았다.

파스텔톤의 바다, 해변의 검은 자갈, 하얀 절벽, 절벽 위의 푸르른 초원이 모두 좋았다. 그리고 절벽의 이름이 Seven Sisters라는 것도 좋았다.

해변에 앉으니 자갈이 머금고 있는 온기가 날 붙들었다. 자갈에 앉아 책을 읽고, 샌드위치를 먹고, 이야기를 나누니 시간이 바람 같았다.

‘아빠! 해가 뜨고 있어? 지고 있어?’ 예준이가 평소에 자주 하는 질문이다. 노는 시간이 아쉬운 예준은 ‘해가 지고 있다’는 대답을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오후 네시까지는 ‘해가 뜨고 있다’고 말한다.

세븐 시스터스에서는 그게 잘 통하지 않았다. 남해 바다에서는 해가 지는 모습을 해가 뜨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해는 빠르게 지고 있었고, 도버를 출발하여 대서양으로 출발하는 화물선도 빠르게 동에서 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성은 절벽에서 돌조각을 떼어 왔다. ‘아빠! 이건 chalk인데.’ 하얀 절벽은 초크다. 공룡이 살던 백악기의 그 백악이 바로 이 초크다. 재단사가 사용하는 하얀 돌이 바로 이 초크며, 떠든 사람 이름을 칠판에 적던 분필이 바로 이 초크다. 영국이나 프랑스 해안에 있는 하얀 절벽은 모두 초크다.

생각해보면 칠판이나 분필은 참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서당과 20세기 학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교육의 효율성이다. 칠판과 분필 덕분에 교육 효율성이 크게 증대 되었다. 칠판과 분필이 없었다면, 근현대 교육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칠판과 분필의 사용은 1801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시작되었다. Old High School의 교장이며 지리 선생님이었던 James Pillans가 처음으로 고안해냈다. 그는 칠판에 세계 지도를 자주 그렸는데, 다양한 색상의 분필도 처음으로 만들었다.

칠판과 분필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최초의 칠판은 검은색이었다. 그래서 blackboard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우리 아버지들은 칠판을 흑판이라고 불렀다. 흑판은 160년이 넘게 사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녹색 칠판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아이들 눈을 덜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흑판이 녹판으로 대체되었지만, 녹판이 흑판보다 좋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분필 자국이 남았을 때, 녹판은 흑판보다 자연스럽게 흰색 자국을 받아들였다.

소련이 망하고 5년 5개월 만에 소련 지역에 가서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소련의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었고, 모든 것이 신기했다. 소련 시기의 칠판과 분필의 퀄러티를 경험해 보았다. 우리나라 1980년대 초반 것보다 질이 떨어졌다. 칠판 지우개는 없었고, 걸레 조각 같은 것으로 칠판을 지웠다. 녹판이 좋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분필 자국이 남으면 남은 대로 멋졌다.

이제 영국 학교는 blackboard도 greenboard도 쓰지 않는다. chalkboard가 사라졌고 whiteboard가 사용된다. 우리 아이들은 녹색 칠판에 남은 하얀색 분필 자국의 멋들어짐을 알지 못한다.

백악의 절벽 Seven Sisters에 앉아서 예성이가 들고 온 초크 조각 하나에 1801년의 스코틀랜드의 교실, 1940년대 아버지의 교실, 1980년대 나의 교실과 1990년대 소련의 교실을 다녀와 본다. 경치가 스펙타클하니 생각도 시공간을 스펙타클하게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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