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프
찰스 다윈의 고뇌와 페부커의 걱정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영화가 있는데, ‘미술관이 살아있다’는 영화가 나온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미술관이 닫히면 그림 속의 인물이 액자 밖으로 나온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같이 시나리오를 써 볼 사람이 없을까?
런던의 중심부에 내셔날 갤러리가 있다. 그 옆에 내셔날 포트레이트(초상화) 갤러리가 있다. 내셔날 갤러리에 지쳐서 옆에 있는 포트레이트 갤러리는 지나치기 십상이다. 초상화 195 000점을 보유하고 있는 포트레이트 갤러리는 전시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미술관 벽면을 차지하고 있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인물의 역사적 의미가 깊어야 하며, 초상화 자체의 작품성이 좋아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조금만 부족하면 바로 창고행이다. 창고에서 잠을 자게 된다면, ‘미술관이 살아있다’는 영화가 만들어져도 출연이 기대난망이다.
‘미술관이 살아있다’를 찍는다면. 내셔날 포트레이트 갤러리의 주인공은 논쟁의 여지없이 찰스 다윈이다. 그림 속 인물의 카리스마가 미술관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미술관을 차지하고 있는 역대급 왕, 종교 지도자, 과학자가 모두 다윈에게 달려들 것이다. ‘네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주장했다며?’, ‘네가 종의 기원을 썼다며?’, ‘적자생존이 뭐가 어쨌다고?’ 등등의 질문이 엘리자베스 여왕, 존 웨슬리, 셰익스피어 그리고 뉴튼에게서 나올 것이다. 대답을 듣고 나서는 찰스 다윈을 몹시 질책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찰스 다윈은 주인공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찰스 다윈은 부잣집 손자다. 친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은 유명한 식물학자이자 철학자다. 외할아버지 조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는 가정 주부의 로망인 그릇 Wedgwood의 창업자다. 와이프는 웨지우드의 친손녀이자 자신의 사촌인 엠마 웨지우드다. 덕분에 찰스 다윈은 평생 한 번도 돈을 벌어 보지 않고, 생각과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조상 덕에 여유가 있고 당당했을 것이다. 다만 미술관의 역사적 인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세상 전체와 맞설 때도 당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댓글을 볼 때면, 간혹 긴장감이 생기곤 한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슈에 대한 포스팅 하면, 예상되는 반론에 긴장하는 경우가 있다. 런던 시간으로 밤에 글을 올리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많은 댓글이 달려 있으면 공격적 비판이 비판이 두려워 페북을 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찰스 다윈이 1859년 11월 24일에 [종의 기원] 초판을 발행하고 느꼈을 불안감과 긴장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JK 롤링의 [해리 포터]가 초판이 500부 발행되었는데,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1 250부가 발행되었고, 발행 첫날 모두 팔렸다. 뜨거운 관심 속에 발행된 [종의 기원]이 가져올 논쟁을 찰스 다윈은 어떠한 마음으로 준비했을까? 과학계에서, 종교계에서, 학교에서, 부엌에서, 길거리에서 일어날 공격에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책을 출간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정원에서 어린아이들과 공 놀이를 했을 것이다. 오늘 그의 집에 찾아가 보았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30분 차를 타고 가면, 갖가지 나무와 무성한 풀로 우거진 마을이 나타나고, 찰스 다윈의 집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찰스 다윈이 40년간 생각하고 일하다가 죽었다.’라는 현판이 있다.
찰스 다윈의 집은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큰 길에서 보는 건물의 뒷면은 덩쿨나무로 아름답다. 절반은 담쟁이가, 절반은 등나무(위스테리아)가 감싸고 있다. 사이클 리스트들이 사이클을 타고 가다 멈춰 사진을 찍고 간다. 관목으로 둘러 쌓인 담장 너머에는 영국식 정원이 있을 것이다. 정원에 핀 꽃을 보면서, 꿀벌이 앉기에 편한 꽃이 적자가 되어 생존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코로나로 문이 닫혀 있어 오늘은 찰스 다윈의 정원, 그린 하우스, 그리고 넓은 대지를 구경하지 못했다. 닫힌 문은 밀면 열릴 것도 같았지만 밀어 보지 않았다. [종의 기원]을 세상에 내고 긴장감에 사로 잡혀 있을 찰스 다윈을 만나게 될 것만 같았다. 오늘은 왠지 박물관이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코로나가 끝나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오는 게 좋겠다. 웨지우드 찻잔으로 차를 마시면서, 여유 있게 정원의 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다시 오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