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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n 03. 2020

인종 차별, 경찰 권력, 그리고 개인의 자유

런던 라이프

Where are you from? 인종 차별, 경찰 권력과 개인의 자유


‘너 몇 살이야?’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 보고, 물어본 질문이다. 처음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 때는 20살 대학생과 15살 중학생이 서로 친구라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당시에는 사람을 만나면 ‘너 몇 살이야?’라고 자주 물어보았다. 여성에게는 최대한 에둘러 물어서 나이를 알아냈다. 나이는 중요했으니까!

누구나 들어 봤을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 회사에 다니는 한국 사람이 업무상으로 젊은 친구와 언쟁을 벌이다가 감정이 격해진 끝에 나왔다는 전설적인 대사 말이다. ‘How old are you?’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언제부턴가 상대방의 나이는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한국인 티가 덜 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와이프는 그건 한국인 티가 아니라 시골 티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한국인 티 같다. 우리나라도 나이 묻는 것이 예전처럼 흔하지 않다. 나는 해외 생활이 15년 차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하는 질문이 있다. Where are you from?(От куда ты?)

런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상대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거나 억지를 부리면, 어느 나라 출신인지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뜬금없이 ‘Where are you from?’하고 묻는다. 그러면 from Kings Cross, from Wimbledon과 같은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급기야 ‘아니 그거 말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여기서 태어낳다고! 그럼 너네 부모님은 어디서 왔는데?’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런던에 어울리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궁금한 걸 어찌할까?

인종 차별이 적다는 것은 런던 라이프의 장점이다. 차별이 적은 이유는 차별에 대한 처벌이 엄하기 때문이다. 런던을 런던다워 보일 때는 인종, 종교, 성별, 성적 취향의 다양성이 존중받늘 때다. 학교에서 F자 욕을 할 경우에 저학년 경우는 주의를 받고, 고학년 경우는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관용이 없다. 디텐션에 심지어 정학까지 당할 수 있다. 비하의 의미로 ‘너 중국인이지?’라고 말하거나, 흑인 학생이 ‘난 흑인이니까...’라고 시작하는 자기비하성 발언에 ‘어!’라고 대답만 해도 정학을 받을 수 있다.

차별의 의도 없이 물을 수 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출신 국가, 피부색, 인종, 성적 취향, 종교 등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좋다.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질문이 오갈 수는 있지만, 나처럼 습관적으로 ‘Where are you from?’이란 질문을 던지는 런던너는 거의 없다. 런던 라이프가 깊어 지지만, 나는 아직 런던너가 되지 못했다.

다양성의 도시 런던은 미국 경찰의 인종차별 살인을 남의 일처럼 구경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백 명이 죽는 와중에 시내 한복판에서 항의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항의 시위는 정부의 코로나 방역 지침을 어긴 것이지만, 기꺼이 박수를 보내 주고 싶다.



그러나 인종 차별에 민감한 런던너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런던 경찰이 점차 권위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 런던 경찰은 인종차별적이지 않지만, 눈에 띄게 권위적으로 변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럭다운이 되었을 때, 시민들은 운동과 식료품을 사는 목적 이외에는 집에 있어야 했다. 경찰에게 사람이 모이는 것을 해산시킬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조치가 발표되었을 때 영국 경찰은 스스로 놀랐다. ‘우리가 어떻게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실제로 공원에서 이야기도 나누었고, 스포츠도 즐겼지만, 경찰이 깊게 관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조금씩 관여가 시작되었고, 이따금 갈등이 목격되었다. 길거리에서 경찰의 권위적인 대응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다. 불친절한 경찰과 강한 공권력은 런던을 런던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경찰은 원래 젠틀맨이어서 친절하고, 러시아 경찰은 심성이 나빠서 권위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권한이 주어지고 통제되지 않으면, 권한은 반드시 남용된다. 한번 권위적으로 바뀌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마치 묶는 방향으로는 쉬워도 푸는 방향으로는 안 풀리는 cable tie처럼 말이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이 누군가에게 부여되기 위해서는 공공의 질서와 개인의 안전이라는 명분이 필요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정부의 권한이 커진 것은 경찰력뿐 아니다. 질병관리본부, 출입국관리사무소, 검찰, 재경부, 국회 등등.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재정 정책을 발동하며, 과도한 법안을 제출하고, 개인의 출입국 정보와 이동 경로가 마구 잡이로 뿌려진다. 대의명분을 업고 조여지는 cable tie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조여지던 cable tie가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I can’t breathe’라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세상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지만, 미국 경찰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묶는 사람은 잘 풀어주지 않는다. 묶이는 사람이 스스로 풀어야 한다. 럭다운은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럭다운의 해제는 민간 주도로 이뤄져야 한다. 현대인에게 자유는 삶의 본질이지만, 지배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는 리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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