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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18. 2020

벨라루스와 ‘국가가 허락하나?’라는 말

국제 정치

벨라루스와 ‘국가가 허락하나요?’라는 말
  
    
97년에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놀라운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툭하면 ‘정부에서 허락할까?’라고 말하곤 했다. 정부의 허락, 국가의 허락이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쓰였다. 무엇을 하든지 절대선이었던 프로레타리아트 독재 국가의 생각이 제일 중요했다. 정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정부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고사하고 좋은 뜻에서 질문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런 소비에트 잔재는 대부분 지역에서 빠르게 없어졌다.

2018년 1월부터 사업상 벨라루스를 왕래했다. 여자는 미인이었고, 남자도 잘 생겼다. 벨라루스인이 허우대는 남녀 불문하고 러시아인보다 나은 것 같았다. 민스크는 깔끔하고 언뜻 보면 잘 사는 나라 같았지만, 나라도 국민도 가난했고, 사람들은 말 끝마다 ‘정부가 허락하나?’ ‘그거 하면 감옥에 가지 않아?’라고 물었다. 러시아 사람은 정부 비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을 때, 벨라루스 사람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20년을 변하지 않은 느낌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업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참을 벨라루스를 왕래했다.

벨라루스 사람들이 20만명 민스크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 놀라웠다. 벨라루스에 있는 지인에게 ‘너희가 데모를 하다니 놀랐어!’라고 말을 거니, ‘우리 모두가 더 놀랐어!’라고 답했다. 26년간 대통령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젊은 루카센코가 또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민들이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 중 두 명이 총격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종자가 80명을 넘는다고 말한다. 40세에 대통령이 되어 66세인 루카센코는 ‘내가 죽기 전에는 물러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입장이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한 나라다. 러시아를 버리고 서방을 선택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라다. 푸틴의 생각이 중요하다. 푸틴은 루카센코를 지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푸틴은 선거의 결과가 나오자마자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지만,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이고 있다. 푸틴과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벨라루스지, 루카센코가 아니다. 루카센코를 지키지 못하면 벨라루스가 서방으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반정부 인사들이 반러시아, 친서방 성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야당을 대표한 스베뜰라나 치하노우스카야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러시아는 아니다. 러시아와 푸틴의 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대안 세력만 세울 수 있다면, 루카센코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26년간 독재는 대안 세력의 씨를 말려 버렸다.

이번 대선에서 2위를 한 야당 지도자인 스베뜰라나 치하노우스카야는 정치 경력이 전혀 없다. 그녀는 영어 선생님이었고, 영어 통역사였다. 방학 때마다 아일랜드를 자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남편과 많은 반정부 인사가 체포 되거나 체포를 피해 해외로 도치했다. 남편을 대신해 출마하면서 하루 아침에 저항의 상징 인물이 되었다. 벨라루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마땅한 야당 지도자가 없는 것이 현재 벨라루스의 고민이고, 푸틴의 고민이다.



국가 권력을 무서워하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잠재된 불만이 터졌으므로 시위가 쉽게 잠재워지지 않을 것이다. 시위대는 하얀 바탕에 붉은색 줄이 있는 깃발을 들고 나왔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구성된 현재 국기를 거부한다. 현 국기가 소련시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벨라루스는 ‘소련식 지도자’와 ‘소련식 정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부가 허락하나요?’라는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다.

무질서보다 나쁜 것은 없지만, 현 체제만큼 나쁜 것도 없다. ‘국가가 허락하나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할 수 있는 비즈니스는 없다. 벨라루스가 질서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멋진 남녀만큼이나 멋진 경제, 멋진 나라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시위대가 외치는 소리는 ‘지베 벨라루스(Жыве Беларусь)’다. ‘벨라루스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벨라루스는 26년간 별로 살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살아나기를 바란다.

우리 비즈니스? 그건 잘 되지 않았다. 민스크에 있는 한국 공무원들은 하나 같이 벨라루스에 비즈니스 하러 온 우리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의 심드렁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맞았지만, 두고두고 기분이 나빴다.

시위대의 구호처럼 벨라루스가 살아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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