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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21. 2020

신뢰와 통계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문제점

런던 라이프

신뢰와 통계의 나라, 그리고 문제점
  
  
영국은 신뢰의 나라다. 일단은 상대방이 말한 것을 다 믿어 준다.

런던에서 다른 도시를 가는데 표가 없을 경우에 ‘표를 잊어버렸다.’고 하면 일단은 믿어 준다. 이런 적이 있었다. 런던에서 출발하여 외곽 도시에 도착했는데, 런던 교통카드로 게이트 문이 안 열렸다. ‘지금이라도 편도표를 사겠다.’고 했더니, 도착지 역무원이 ‘런던에 언제 어떻게 돌아갈 것이냐?’고 물었다. ‘저녁에 다시 기차로 돌아갈 것이다.’ 검표원은 ‘그러면 지금 편도표를 끊지 말고 그냥 가고, 저녁에 갈 때 왕복표를 사서 가!’라고 권유했다. 편도표 두개보다는 왕복표 하나가 더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바람에 기차로 돌아가지 않았고, 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 순간은 내게 두고두고 미안함으로 남았다.

이런 믿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믿어 준다고 거짓말을 쉽게 할 수는 없다. 거짓말이 탄로 나면 다음부터는 믿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를 잃으면 곤란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영국은 통계의 나라다. 통계학이 시작된 나라며, 통계에 관련한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다. 모든 정책에 통계적 뒷받침이 있으며, 무슨 일이 발생하면 다양한 통계 분석이 즉각 나온다. 통계와 모델링에 자신 있는 나라다. 거시경제학이 시작된 나라도 영국이다.

거시적 통계가 강조되다 보면 감정에 소홀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 초창기에 영국 정부가 감염률, 사망률을 예측했을 때, 어느 기자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느냐?’며 물었고, 국가 수석 의료 담당관인 크리스 위티(Chris Whitty)는 ‘노인이라고 다 돌아 가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황당했다. 그리고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영국인과 큰 간극을 느꼈다.

사망자 수가 만명을 돌파하고 이만명을 향하자 통계에 기반한 정책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통계로 지배되지만 감정에 지배되는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초창기에 전국 단위의 시험인 GCSE(고등학교 졸업시험)와 A-Level(대학 입학시험)을 취소했다. 시험을 취소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나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영국 사회는 시험 없이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다. 영국이 신뢰와 통계라는 두개의 무기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GCSE와 A-Level 점수를 학교 선생님이 제시하고, 시험 평가 기관이 통계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선생님 점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시험 없이 성적을 제시할 계획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신뢰와 알고리즘에 대한 자신감이 모두 있었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점수를 준다는 것은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A-Level에서 선생님이 점수를 줬고, 알고리즘이 그 점수를 조정했다. 선생님 점수 중에 38%가 한 등급 강등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선생님이 아무리 공정하려고 노력해도 자신이 가르친 학생 점수를 조금이라도 올려 주려는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학생의 잠재력을 최대한 점수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선생님 점수를 깎자 반발이 강하게 나왔다. ‘점수가 깎이는 경우가 사립학교보다 공급학교에서 많이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영국 사회의 약한 고리를 치고 나왔다. 빈부격차와 비싼 사립학교 학비가 영국 사회의 단점 중에 하나다. 아마도 알고리즘이 직전 3개 연도 학교 성적을 감안하기 때문에 선배들 성적이 좋지 않았던 학교에서 점수 강등이 더 많이 나왔던 모양이다. 통계적으로 조정된 점수는 학생과 학부모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선생님이 학생을 잘 아느냐? 알고리즘이 잘 아느냐?’ ‘알고리즘도 약자를 알아보는가?’는 항의가 이어졌고, 항의는 예상보다 강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후퇴하여 A-Level에서 알고리즘을 무시하고 선생님 점수를 최종 점수로 인정했다. A-Level 성적 발표 일주일 후에 발표된 GCSE 성적에서는 알고리즘 성적 자체가 발표되지 않고, 선생님 점수를 그대로 인정했다. 좋게 말하면 알고리즘이라는 괴물에 대한 선생님의 승리며, 통계에 대한 신뢰의 승리다. 나쁘게 말하면 점수 인플레이션과 일부 억지 점수가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각 과목당 평균적으로 22% 정도가 7점 이상을 받았는데 올해는 29%가 7점 이상을 받았다. 인플레이션이 7% 포인트 발생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제에만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을 신뢰하는 문화는 부럽다. 억지가 통계를 이기는 것은 아쉽다. 신뢰와 통계에 기반한 사회라는 것이 영국 사회의 장점이지만, 사람들의 감정선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 영국 사회의 단점이다.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모두에게 많은 돈을 주면 당장은 모두 행복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피해는 차곡차곡 쌓인다.

첫째 아이가 이번에 11학년을 마쳤고, GCSE에서 10과목 전부 최고점인 9점을 받았다. 선생님 점수에서 모두 9점이다. 알고리즘 점수에서도 모두 9점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난 의심하지 않는다.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말이다. 이제 9월부터 A-Level 과정에 돌입한다. 그 과정을 마치는 2년 후에도 오늘과 같은 큰 만족이 있기를 바란다.

영국 경제에도 인플레이션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물건 값이 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약자를 강타한다. 점수 인플레나 경제 인플레나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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