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Mar 28. 2022
웅이는 진돗개다. 처음에 한동안 마당에서 자유롭게 산 적이 있다. 그러나 생의 대부분을 줄에 묶여 살았다. 청이 백이는 묶여 살지 않았고, 토리는 묶어 놓았었는데 청이가 죽은 후 그 자리를 대신하느라 풀어주었다.
웅이가 묶여있었던 이유는 집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었다. 묶어 놓지 않으면 나가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토리는 제 능력으로 울타리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개별적인 문제였는데 웅이는 어느 울타리 아래를 파서 나갈 구멍을 만들기 때문에 웅이가 나간다는 것은 청이와 백이도 모두 나간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우선 동네 민원을 야기했다. 밭을 밟고 돌아다녀서 멀칭 비닐에 구멍을 내놓기도 하고, 뒷산에 올라가 산소 마당에 변을 보아 놓기도 했던 것이다. 더욱이 곤란한 것은 우리가 출근할 때였다. 차 나가려고 대문을 열어 놓고 다시 차에 앉는 순간 쏜살 같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바쁜 출근 시간에 개들 이름을 목 놓아 불러야만 했다. 간신히 가두어 놓고 출근을 해도 언제 또 웅이가 개구멍을 팔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치사한 자식, 토리처럼 능력껏 뛰어넘는 것도 아니고 개구멍을 파다니, 진돗개가 체면이 있지...!”
거기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도 많아서 집을 지키는 것도 시킬만하지가 않았다. 특히 남자 어른이 오면 꼬리를 바짝 집어넣고 숨었고 한 번은 오줌을 싸기도 했다. 오히려 암컷인 청이가 집도 보고 대장 노릇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근무 중에 동네 분 에게 전화를 받았다. "개가 덫에 걸렸는데 그 집 개 같으니 와서 구해 가라."는 것이었다. 동네 분 중에 야생 동물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사람이 있다는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전 어느 밤에 자다가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남편이 나가 보았는데 웅이가 덫을 끌고 들어와서 절그덕 절그덕 하더란다. 한쪽 다리를 물린 채로 왔는데 땅에 고정하느라 박아놓은 커다란 쇠못까지 뽑혀서 끌려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단히 걸린 모양인지 빠져나오지 못했고, 덫을 놓은 이가 돌아보러 갔다가 발견한 것 같았다.
서로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우리는 개 관리를 제대로 못한 잘못이 있고 상대방은 불법 포획 도구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웅이가 사람들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어서 손을 쓰지 못했다. 남편이 가서야 비로소 웅이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웅이의 얼굴에 가마니를 씌워놓고 간신히 덫을 제거했다고 한다.
그 일로 우리는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산다고 해도 마당의 잔디밭에 개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로망을 실현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웅이는 그때부터 이제껏 십삼사 년을 마당 한 구석에서 목줄에 매인 채 살 게 되었던 것이다.
* * *
얼마 전 출근을 하려고 나섰는데 남편이 내게 말했다.
"올 때 슈퍼 들러서 닭 좀 한 마리 사 와요. 백숙 거리로."
"왜요? 백숙 드시게?"
"아니, 웅이 좀 먹이려고."
가끔 개들을 위해 닭을 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웅이를 위해 산 적은 없었다. 주로 청이나 토리가 새끼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를 위해 샀었다.
"웅이는 갑자기 왜요?"
"요새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실비실하는 게 영 시원찮어. "
"그래요?"
뿐만 아니라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잘 안 보이는 것 같다고 한다.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르고 있다가 기척을 주면 깜짝 놀라고 그래. 이젠 풀어주어야 할까 봐.”
'이젠'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웅이의 날들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가끔 어쩌다 내가 웅이 쪽으로 가도 웅이가 별 반응이 없기에 나는 나에게만 그러는 줄 알았었다. 나는 원래 개들에게 주인 노릇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에는 쳐다보고 꼬리를 두세 번 흔들거나 하는 반응은 있었는데 그러지 않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게 눈과 귀가 어두워서 그런 것인 줄은 전혀 몰랐다.
“며칠 전부터 밥도 잘 안 먹고 일어서지도 못하네.”
“웅이가 앉아있다고요?”
“응. 누워있어.”
“심지어 누워있어요?”
그게 왜 놀랄 일이냐면 웅이는 항상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집도 하나 놓아주었지만 거기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비가 와도 비를 맞고 눈이 와도 눈을 맞고 서 있었다. 분명히 밤에 자기는 할 텐데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귀가 밝아서 작은 기척에도 나와 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거실 안에서 밖을 몰래 내다볼 때도 웅이는 서 있었다. 남편은 웅이가 서 있는 모습을 자주 쳐다보곤 했다.
“여보, 이리 와 봐.”
“왜요?”
“저기 봐. 웅이 멋있지?”
“엥? 뭐가요?”
“서 있는 자세 멋지잖아!”
그냥 서 있는 게 멋지다니, 대체 뭐가 멋지다는 건지? 내가 보기에는 엉성한 말썽을 일으켜서 자기 집 마당에서도 묶여 지내는 개가 한 마리 있을 뿐이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남편도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아마 남자들만 알아보는 수컷의 매력이 따로 있는 건가?
여하간 웅이가 누워있는 것 그 자체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풀어주자 앞마당 햇볕 바른 쪽으로 와서 걸어 다니기는 했다. 웅이가 걸어 다니는 모습은 그의 노쇠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에 남편이 웅이의 멋진 모습을 설명할 때는 모르겠더니만 웅이가 얼마큼 늙고 허약해졌는지는 바로 알겠다. 구부정한 자세와 느린 걸음걸이, 그런데 그 충격이 낯설지 않았다. 얼마 전에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개가 아니고 사람이었는데 바로 저 건너 윗집 아저씨였다.
한 동네 살기는 해도 우리 집은 외따로 떨어진 데다가 동네 사람들과 생활상 겹치는 것이 없어서 서로 볼일이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전에는 봄가을로 마을에서 차를 대절하여 놀이를 간 적이 있어 그때 어울린 적이 있었고, 정월 대보름 무렵 동네 회의를 한다고 반장님 댁에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는 그런 것이 차차 없어지고 있다. 근래에 모임이 없어지는 것은 첫째 코로나 탓일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아니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노인들이 사시는 몇 가구 되지 않는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한 집 두 집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채 스무 가구가 안 되는 동네에서 우리가 들어가고 난 뒤만 해도 돌아가신 분이 열 분 정도나 된다. 둘 중 하나를 여의고 혼자 사시던 분이 마저 돌아가신 집도 세 집이나 있다. 남아계신 분들도 한참 만에 뵈면 그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사이에 모습이 저렇게 변하였나!
그런데 공교로운 것은 내가 보고 놀랐다는 분이 예전에 웅이가 덫에 걸렸을 때 그걸 설치한 그 아저씨였다는 것이다. 그때 그 덫에 걸렸던 웅이나 그걸 놓았던 아저씨나 이제는 걸음걸이마저 분명치 않은 노년의 한 때를 지나고 있다.
나는 작년에 환갑을 넘겼지만 이제까지 나이를 먹어서 나쁜 것은 없었다. 오십이 육십이 되는 것이 가져온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십이 팔십이 된다거나 팔십이 구십이 되는 것은 다를 것이다.
내가 사 온 닭은 남편이 직접 삶았다. 그리고 부드럽고 고소한 닭다리 한 개는 내게 주었다. 자기도 조금 먹기는 했는데 시늉만 하고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다른 개들에게도 조금씩 주었지만 대부분은 웅이 몫이었다. 남편 말로는 식사를 거부하던 웅이가 닭백숙은 그래도 좀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삶아 주었다.
“여보, 웅이 저기 좀 봐봐.”
“왜요? 또 무얼?”
웅이가 마당을 산책하고 있다고 했다. 먼저는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는 것만 보아도 반가웠다. 그리고 어느 날은 다른 개들과 함께 거실 앞 데크에 올라와서 우리를 기다리기도 했다.
“저것 좀 봐. 겅중겅중 뛰는데?”
“그러네. 웅이 이제 좀 살만한가 보네요.”
* * *
웅이는 자유를 찾은 뒤로는 마당에서 자기 맘대로 살고 있다. 종일 햇볕을 쬐고 마당을 걷고 힘들면 따뜻한 곳을 찾아서 잠을 청한다. 젊고 팔팔할 때는 자유를 얻지 못했고, 이제 아무것도 할 힘이 없어지자 자유를 얻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예전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지금은 웅이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울타리 안에서의 생활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어서 다시 묶어 놓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곤란한 점이 남기는 했다. 변을 여기저기 보아 놓는 것이다.
남편이 나가서 삽을 찾으면서 웅이한테 말했다.
“웅이 일루와 봐! 이거 네가 그랬지!”
거기다가 기운을 좀 차리고 나더니 강아지들을 혼내키고 있다고 한다. 강아지들이 비명을 질러서 가보면 웅이가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웅이는 안 이쁘지만 강아지들은 이뻐한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으이구, 웅이 다시 묶어주세요.”
겨우 살려 놓았더니 껄렁한 짓만 하고 있다. 그러나 웅이의 남은 날들을 위해서 그 정도는 봐주기로 했다. 토리한테도 순이한테도 랑이, 까미한테도 환영받지 못하는 웅이지만 오직 주인아저씨만은 아직도 웅이를 좋아한다. 청이도 백이도 그러했듯이 웅이도 마지막 날까지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지는 못했지만 안전하게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