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Apr 21. 2023
지난번에 송악에 놀러 갔다가 호두를 한 봉지 얻어왔습니다. 식탁 위에 놓아두고 지나다가 눈에 뜨일 때 한 두 개씩 깨어먹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혼자 집에 있자니 심심해서 손 안에서 굴리고 놀 호두를 골라보았습니다. 우선 여러 개 중에서 가장 동글하고 크기가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낸 다음 그것에 가장 어울리는 걸 골라서 짝을 채우면 되는 겁니다.
‘음... 이건 좀 세로로 길쭉해서 안 되겠고, 이건 모양은 좋은데 겉이 좀 지저분하고, 이건 다 좋은데 크기가 안 맞고…….’
호두가 많아도 맞춤한 짝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이걸 골라 좋으면 저게 더 나은가 싶고 저걸 고르자니 먼저 것이 나은가 싶고.
* * *
“선생님! 투표 언제 할 거예요?”
“투표?”
“한다고 하셨잖아요. 짝꿍 투표!”
재*이가 전학 가고 나서 아이들이 짝을 다시 정하자는 걸 대답을 안 하고 있었더니 오늘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짝꿍 투표를 하자고 아침부터 성화입니다.
“뭘 맨날 짝을 바꾸자고 그래? 그냥 앉아.”
“안 돼요. 오늘 해요. 그리고 이번에는 여자들이 뽑을 차례예요.”
종이에다 남자애들 이름을 쓴 다음에 여자들이 뽑으면 된답니다. 제가 또 미적지근하게 그냥 넘어갈까 봐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앉고 싶은 애를 뽑지 그래? 은* 너 누구랑 앉고 싶은 애 있어?”
“아~ 안 돼요. 안 돼요. 직접 뽑는 건 싫어요.”
같이 앉고 싶은 아이가 있지만 자기가 직접 고르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 ‘인생은 선택이 아니라 인연’이라더니 아마 은*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친구와 짝이 되는 것을 우연에 의존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럼 윤*이가 수*랑 앉기는 또 틀려버리겠구나…….’
윤*이는 똑똑한 수*를 좋아하는데 처음에 두어 달 같이 앉아보고는 계속 인연이 엇갈렸습니다. 그런 차에 재*이가 전학을 가서 수*가 짝꿍 없어 어떡하느냐니까 아이들이 ‘윤*이 보고 짝하라고 그래요.’ 했었지요. 그런데 수*와 짝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또 제비 뽑기를 하면 같이 앉게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아요?
그런데 뜻밖에 윤*이도 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저는 보*이랑 앉고 싶어요.’ 합니다.
“응? 왜?”
“그냥요.”
그냥? 그러나 윤*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재*이가 전학 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재*이가 좋아하던 보*이랑 앉고 싶다니, 친한 친구 믿을 것 하나 없네요!
제비 뽑기를 하고 보니 정말 보*이가 윤*이를 뽑았습니다.
“야! 정윤*! 이것 좀 봐!”
보*이가 쪽지를 펴 보여주니까 둘이서 손뼉을 치고 책상을 옆으로 나르고 아주 깨가 쏟아집니다. 수*는 지난번에 앉았던 성*가 다시 짝이 되고, 짝 바꾸기를 적극 주장했던 은*도 원래 짝이었던 승*이를 찾아갔고 시*이는 짝이 있다가 없어졌는데 ‘에이, 혼자 앉아서 좋다!’ 합니다.
* * *
한바탕 북새를 떨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어 명이 새 짝이 맘에 안 든다고 같이 밥 먹기가 싫다는군요. 우리 반 지정석이 아닌 다른 데 가서 멀찌감치 떨어져 먹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짝꿍투표 하자고 할 때 걱정되던 게 바로 이런 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가지고 놀 호두알 두 개 짝 맞추는 것도 쉽지 않던데 날마다 같이 앉을 짝 정하는 게 맘에 꼭 맞을 수가 있으려구요.
2002.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