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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Jun 05. 2023

인생 페이

알고 보니 후불

지난 연휴 때의 일이다. 월요일이 대체 공휴일이어서 3일 연휴가 되었었다. 일기예보를 보았더니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와서 별다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냥 편안한 시간에 일어나서 편안한 시간에 아침을 먹었다. 간단한 청소를 하고 화분도 조금 들여다보고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마치 연못 속의 물고기가 된 듯 거실 안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점심때 아들네 가족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2층에 올라가서 포켓몬과 도깨비가 되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날이 저물어 저녁을 먹은 후에 아들네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고 남편은 TV를 보고 나는 휴대폰 놀이를 했다. 실컷 놀았는데 아직도 10시다. 낮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졸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걱정 없다. 자고 나도 휴일이 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을 수가... 생각해 보니 인생이 참 아름답다. 맨날 휴일이면 더 그렇겠지. 내년 가을이면 나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 나는 사실 올가을에 그렇게 되면 어떨까 생각 많이 했었다. 며칠 뒤까지는 아직 명예퇴직을 신청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엔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책장을 미리 덮기에 명분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들기 때문이다. 이미 결말을 알겠고 이제는 그만 읽고 싶더라도 나는 책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을 생각이다.     


휴일에는 퇴직 이후의 생활을 연습한다.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토록 선망하던 자유로운 삶, 내가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은 시간에 구애 없이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는 것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햇볕이 좋은 날, 비가 갠 뒤 흰 뭉게구름이 하늘 가득히 뜬 날, 여름꽃들이 스러지고 선듯한 가을바람이 부는 날, 차를 타고 풀과 나무, 꽃, 구름 그림자 내려앉은 산과 언덕들, 그 뒤로 넘어가는 저녁해와 붉은 노을,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맘껏 주유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에는 집 안에 머물며 따뜻하고 안전한 긴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내게는 남은 1년이 길다. 여태껏 지나온 수십 년도 있는데 그 1년이 무에 그리 길까마는 마음속에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 있으니 그러는 것이다. 한편 생각해 보면 시간에 대한 인식도 참 부조리하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의 속도에 시시 때때 놀라면서도 어느 때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이 양존하니 말이다.     


    *     *     *     *     


그런데 이제 곧 맞이할 퇴직 후의 아름다운 인생에 주의 신호가 뜨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병원 갈 일이 많다. 당뇨와 고지혈 등이 경계선에 있어서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고 치과는 이미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 정도의 이력이 있다. 얼마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치료를 받는 데다가 며칠 전에는 건강진단에서 폐결절이 의심되니 정밀진단을 받으라고 해서 CT를 찍었다. 그런데 폐는 괜찮고 간에 물혹이 있다고 했다. 한동안 괜찮아서 방심했던 위장이 다시 아프고, 병원에서 허리 사진을 찍을 때 목도 안 좋다고 했더니 목 사진을 찍어보잔다. 그러더 허리보다 목이 더 문제라고 했다. 거북목에 디스크가 흘러나온 곳이 있단다. 이 무슨 총체적 난국이란 말인가? 지난번에 병원에 갔을 때는 의사 말씀이 허리 건강에 좋지 않으니 앞으로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풀 뽑는 거 하지 말란다. 퇴직 후에 마당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을 여생의 주요한 즐거움으로 꼽고 있는데 그걸 하지 말라니 나는 크게 낙심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아직 빨간 불이 켜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병원에서 약 처방을 위해서 혹시 무슨 약 복용을 하는 게 있는지 물을 때 ‘아뇨.’라고 대답할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아직은’이라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바쁘게 살 때는 여유가 없더니, 여유로워질 참에 건강과 체력이 부족하다니 참 인생 얄궂다. 어느 나이대건 꼭 그렇게 공평하게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섞어주어야 할까? 나는 그런 균형 맞추는 거 싫고 좋은 것만 받고 싶다. 인제 보니 인생에서 어떤 좋은 것을 얻을 때는 다른 좋은 것으로 그 값을 치르는 것이지 거저 얻어지는 게 없는 듯하다. 마치 새 자동차를 사고 싶으면 그동안 아껴 모아놓은 돈을 주고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일개 물건도 아니고 자유로운 인생을 얻는 데에 그 값이 얼마나 비싸겠는가? 다만 나는 그 자유를 얻는 대신 지불하는 것이 그동안 누렸던 일하는 보람이라든가 성취감, 나 자신에 대한 사회적 효용감 등 심리적인 것일 줄만 알았는데 이러한 신체적인 지불 요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신체적 하향세는 자유를 얻는 대가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 몸을 사용하여 살아온 데 대한 지불일 것이다. 그 시기가 얼추 퇴직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인생 페이는 기일이 상당한 후불시스템이 아닌가. 더 큰 값을 요구받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이 정도면 인생 크게 밑지지 않고 잘 운영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생활을 꿈꾼다. 그리고 꿈이 있는 한 내 삶은 무료하지 않다. 생각을 해보니 내가 꼭 지키고 싶은 것이 두 가지로 정리된다. ‘건강’과 ‘꿈’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를 알겠다. 건강과 꿈이 사실은 분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몸이 아픈데 꿈이 꾸어질 리가 없다. 몸이 건강하더라도 꿈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겠다. 꿈은 나이가 들어도 열 가지 백 가지를 가질 수 있는데 이 작은 체신에 들어있는 건강은 쉽사리 가져지지 않으니 이제부터라도 몸의 소중함을 알고 잘 살피고 가꾸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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