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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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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Nov 13. 2023

수렴의 계절

주말에 아침을 먹고 나서 마당에 나갔다. 풀을 매려고 나무 아래 앉아 둘러보았다. 그동안 몇 차례의 서리에 웬만한 풀들은 이제 거의 사그라들었고 맥문동은 그정도 무서리에는 아직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꽃무릇은 점점 기온이 낮아지는 날씨에도 한창 파릇한 싹을 키워 올리고 있었다. 꽃무릇은 가을에 잎을 내서 겨울을 나고 장마철에는 고스라졌다가 찬 바람이 불면 땅속에서 꽃대를 올린다. 잡풀이 무성할 때는 꽃무릇이 어디 들어있는지 찾기 어려웠는데 주변의 풀들이 사라지자 꽃무릇의 포기들이 드러나 보였다.


지난 이삼 주 동안은 마당에 나갈 때마다 맥문동의 열매를  모았다. 까맣고 동그란 열매가 꽃이 진 자리에 르륵 달린 채 영글어 있었다. 꽃의 씨를 받는 것은 근래에 내가 발견한 방법이다. 그동안은 심고 싶은 것이 있으면 화원에서 모종을 사서 심었었다. 그런데 작년에 남편이 맥문동 열매를 따서 뿌린 것이 봄에 싹이 튼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게 됐다. 꽃들이 피었다 지는 것이 결국은 씨앗이나 열매를 통한 번식을 도모함일 것이다. 나는 이 꽃들의 전통적인 방식을 잊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기 보다는 그렇게 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모종을 사면 내가 원하는 바를 즉각 얻을 수 있는데 씨를 심으면 싹이 터서 모종으로 자라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마 나는 지금에서야 그런 기다림이 가능해진듯 싶다.


대문 가의 벚나무와 느티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었다. 이제 느티나무 아래에도 가지 사이로 햇빛이 비쳐든다. 가을이 깊어지고 낙엽이 지고 나니 가지의 모습이 보인다. 은행나무 가지는 저렇고, 벚나무 가지는 저렇다. 잎이 떨어진 빈 가지에 빨간 열매를 꽃처럼 달고 있는 저건 감나무이다. 그리고 길가에 나란히 선 잔가지가 얼기설기한 저 작은 나무는 무궁화였다. 지난주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궁화 다섯 주를 모두 대문가에 나란히 옮겨 심었다. 아직 묘목이라서 저만큼 자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잊고 지내는 사이 자라서 늦가을이면 저러한 빈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가을을 지내며 인생의 가을을 생각했다. 사라질 것은 이미 사라지고 주변이 정리되는, 그리고 겨울이 와도 사그라들지 않고 남아 있을 저 가지들 처럼 최종적으로 내게 남을 것들, 고즈넉하고 쓸쓸한 시절의 위안이 될 몇몇 관계와 내가 좋아하는 일 등을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나름대로 개화기와 결실기를 거쳤다. 무엇을 수확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인생의 봄과 여름을 다 지낸 것은 확실하다. 여름 뒤의 짧고 찬란한 가을도 이미 지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앞으로 지낼 것은 지금 처럼 늦은 가을이다.


사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러한 가을이 시작되는 지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내년 9월 1일이다.  전날인 8.31이 마지막 근무일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 그동안의 애환들은 모두 떨구어지고 인생의 끝 지점까지 나를 지탱할 근간과 간결한 가지만이 남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수렴될 것이다. 나는 그때를 예감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도  아름다움이 있듯이 그때에도 내 생이 아름답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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