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Nov 15. 2023
아침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마당에서 한 나이 든 남자가 손에 무엇을 든 채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수염을 길게 길렀다. 남편이 아침 루틴에 따라 바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 오는 중이었다.
내 아침 일과는 출근 준비에 집중이 되어있다. 그중 가장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머리 스타일링을 하는 것이다. 머리를 감고 말리고 모양을 낸다. 그에 비해 화장은 아주 간단해서 5분이면 다 된다. 아침 식사도 간단하다. 어제 먹던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면 된다. 전기밥솥에는 둘이서 아침을 먹을 분량과 점심에 남편 혼자서 먹을 분량의 밥이 되어 있다.
내가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는다. 저녁밥은 항상 돌솥 밥이다. 남편이 집에 있는 한 그렇다. 이것은 남편 퇴직 후 생긴 풍경이다. 나는 찰진 밥을 좋아하고 남편은 고슬한 밥을 좋아한다. 남편은 압력솥밥이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돌솥을 하나 사 오더니 정말로 날마다 돌솥 밥을 짓는다. 나는 처음엔 압력솥 밥보다 푸슬해서 별로 좋지 않았는데 먹다 보니 익숙해졌다. 더구나 내가 퇴근할 때 차에 타서 전화를 하면 바로 가스 불을 켜기 때문에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갓 지은 돌솥 밥을 먹을 수 있다. 요즘은 반찬 걱정도 없다. 지난 주말에 엄마네서 담가온 총각김치와 고들빼기김치가 있어서 끼니때마다 잘 먹고 있다.
남편과 나는 내년이면 결혼한 지 40주년이 된다. 내 나이 스물넷에 결혼해서 지금 예순셋이 되었다. 남편과 함께 산 날이 부모님 슬하에 산 날 보다 훨씬 많다. 스물넷 나이에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감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햇병아리 교사였고 남편은 아직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무얼 믿고 그렇게 했는지 모를 일인데 그땐 별다른 결심도 없이 자연스럽게 된 일이었다. 우리 당고모가 중신을 서셨는데 양가 부모님은 별도의 친분은 없었어도 서로 알만한 집안이었다. 당고모가 우리 아버지께는 사촌 누이였고, 시아버님께는 이종사촌 누이여서 한치 건넌 사돈쯤 되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양가 부모님을 대동하고 맞선을 보았기 때문에 그 결혼은 하면 괜찮지만 하지 않으면 서로 어색한 경우가 될 그런 만남이었다. 그런 중에서 몇 번 만나다 보니 어느새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고 우리는 만난 지 4개월도 다 못 채우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세월이 어느새 사십 년이 거의 되어간다.
지나간 세월은 꿈같이 짧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어렴풋한 기억이 되었다. 딸과 아들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결혼을 시켰고 이제는 또 그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우리가 했던 일들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양상은 다소 다르지만 기본적인 상황은 별다르지 않다. 지난 삼월에는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벌써 학교 공부가 시작되었다. 2학기부터는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보기 때문에 요즘은 혼자서도 공부를 한다고 한다.
오늘은 출장이 있어서 나갔다가 아들네 아파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잠깐 들렀다. 손자 호수가 나를 보더니 삼계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들네 집에서 자주 가는 가까운 삼계탕 집이 있다. 나도 아들네 가면서 저녁으로 삼계탕을 사줄까 생각했었는데 호수도 그렇게 생각을 했나 보다. 다 먹고 나서 아직 퇴근하지 않은 아들을 위해 삼계탕을 하나 포장해서 며느리에게 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들을 다시 데려다주고 주차장에서 헤어진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날은 벌써 저물었고 집에는 나이 든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체구는 작고 수염을 길게 기른 그 사람이다. 수염이 반쯤은 검고 반쯤은 세었다. 내가 깔끔치 않다고 그렇게 성화를 해도 저 수염을 고수하고 있다. 남편은 지금은 사회적 역할이 없는 자연인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등 신경을 쓸 일이 없다. 그리고 수염을 기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남편이 아직 아침마다 면도를 하던 사회인 일 때는 꽤 괜찮은 용모였는데 이제 그런 깔끔한 남자랑 살기는 평생 글렀다. 그래도 괜찮다. 아침에는 달걀을 꺼내다 주고 저녁에는 돌솥밥을 지어주는데 고맙지 아니한가. 이제 곧 나도 퇴직하고 나면 휴일이 아닌 무싯날에 남편이 나를 차에 태워서 놀러 다니기로 약속을 받아 두었다. 사람들도 많지 않고 시간도 여유롭지 않겠나. 그러면 되었다. 그러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