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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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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Jan 15. 2021

참으로 덧없다

토리가 쥐 한 마리를 또 잡았다. 토리는 우리와 함께 사는 진돗개다.

*    *    *

청이가 노쇠한 뒤로 쥐가 전에 없이 성가시게 굴었다. 창고에 들어와 개 사료를 훔쳐 먹고 똥오줌을 싸 놓아서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남편은 그걸 아주 질색을 했다. 자기는 시골 들어와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게 쥐라고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쥐가 우리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 쥐를 내 쫒으려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다 꺼내야 한다. 그러니 그 감당이 쉽지가 않다. 온실에도 가끔 쥐가 들어온다. 온실에는 남편이 삼십 년 가까이 취미로 키우는 난이 있다. 화분만 해도 이백 개가 넘는데 거기서는 함부로 장대를 휘두를 수도 없고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근래에는 쥐가 벽과 내부 마감재인 나무판자 사이로 들어가 독독 긁어 대는 등 그 등쌀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내가 남편에게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다.
“청이한테 쥐 좀 잡으라고 해 봐요.”
“청이 이제 쥐 잘 못 잡아. 통에 들어간 것 갖다 줘도 놓치는 게 반이야.”
“그래요? 왜 그렇지?”
“이빨도 빠졌고 이젠 눈도 어두워진 것 같고, 나이 먹어서 그렇지 뭐.”

전에는 가끔 아침이나 퇴근 후에 무심코 마당에 나갔다가 청이의 전리품을 발견하고는 했다. 쥐 사냥을 해서는 우리의 눈에 잘 띄는 곳에 갖다 놓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이 청이를 불러서 칭찬을 해주고 죽은 쥐를 치우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 혼자 잡기는커녕 코앞에 떨어뜨려 주는 것도 반 밖에 못 잡는다니 이젠 예전의 청이가 아닌 것이다.
“그럼 이젠 토리를 풀어줘야 되지 않아요?”
토리는 똑똑한 데다가 아직 한창 젊다. 영민하고 기민해서 묶여 있는 상태에서도 가끔 쥐를 잡아 놓았다.
“토리를 풀어 놓으면 청이가 옴쭉달싹 못 할걸? 토리를 풀어주려면 청이를 묶어야 싸우지 않을 텐데 이제 와서 청이 보고 묶여 살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젠가 한번 토리가 풀려났을 때 청이가 제 성질대로 했다가 싸움에서 지고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아무리 개라고 해도 십여 년간 누리던 권력에서 밀려난 채 숨죽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가여웠다. 개에 있어 십년이란 거의 일생이고 청이는 누구에게 밑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청이는 동네에 놀러 가는 곳이 있었다. 건너편 맞은 쪽 산 아랫집에 남자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청이는 늙었지만 남자친구는 새파랗게 젊었다. 전에는 그  개가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한번은 웅이랑 크게 싸웠기 때문에 그 주인과 이야기해서 그 개를 묶어 놓기로 했었다. 그 뒤로는 청이가 그 집으로 놀러 다닌다. 지난번 그 싸움이 났을 때 청이가 얼굴을 다치고 피가 났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개가 청이랑 싸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웅이랑 싸운 거였다고 한다. 그 개가 웅이를 공격하자 청이가 중지시키려고 앞을 막아섰다가 청이 까지 다친 거였다. 덩치는 웅이가 더 큰데 웅이는 겁이 많은 데다 묶여있었고 상대편은 온 동네를 활보하던 터라 체구는 작아도 근력이 좋고 민첩했다. 우리 웅이가 이겨서 본때를 보여 주었더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웅이가 일방적으로 밀린 데다가 청이 까지 피를 보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산이(그 개의 이름)를 묶어놓겠다고 했다.

*     *     *

어느 휴일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났는데 전화가 왔다. 바로 청이가 놀러 다니는 건너편 산 아랫집이었다. 그 안주인이 동네 반장 일을 보는 데다가 지난번 수해가 났을 때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일이 있고, 동네에서 우리에게 연락을 해주는 두 집 중 하나여서 그런 일상적인 연락인가 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청이가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기 전에는 마당에 같이 있었다는데  아마 청이가 그 새에 또 나간 것인가. 그래서 일단은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나 물었더니 우리 집 앞길에 개가 한 마리 치어있는데 아무래도 우리 청이 같아 보인다고 했다. 그 집에서는 우리 청이를 자주 보아서 익히 아는 데다 목사리가 청이 거 같다고 하니 우리는 깜짝 놀라는 와중에도 틀림없다 싶었다. 얼른 나가보았더니 청이가 맞았다. 크게 외상은 없었지만 청이를 보는 순간 나는 몇 번의 주검을 본 경험에 의해 청이가 이미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놀라서 서 있었는데 남편이 날 더러 집에 들어가라고 해서 혼자 들어왔다. 그리고 남편은 청이를 수레에 싣고 집 뒷산에 가서 묻어 주었다. 그리하여 청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청이의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식이 될 줄은 몰랐다. 청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황망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어느 날 아침에는 남편이 달걀을 꺼내러 갔다가 밤새 얼어 터진 달걀을 하나 토리에게 주었는데 토리가 그걸 먹지 않고 웅이에게 가져갔다 한다.
“설마 웅이 먹으라고 주는 건가?”
“그렇지.”
“그냥 거기 가서 먹으려는 거 아니고요?”
“아냐. 혼자 먹으려면 굳이 왜 웅이한테 가져가?”
“히야, 신통하네. 토리 정말 착하구나.”
청이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자신의 권위를 해칠만한 관용은 절대 베풀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남편이 마당에서 들어오며 말했다.
“오늘은 달걀을 토리가 먹었어.”
“그래요? 잘 됐네.”

남편이 그러는데 토리가 집도 잘 본다고 한다. 출근을 해서도 집에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서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지나거나 하면 울타리 안쪽에서 따라가며 경고 및 감시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토리가 풀려난 뒤로 퇴근을 했을 때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은 토리의 전리품을 종종 보게 되었다. 예전에 처음 이사 왔을 때에는 개들이 쥐를 잡아 문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 기겁할 일이었으나 십여 년 살면서 일상의 한 부분의 되었다. 더구나 요즘에는 한 동안 쥐에 시달리다 보니 개들이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쥐를 잡기도 어렵거니와 쥐가 아무리 미운들 산목숨을 빼앗는 것도 못할 짓이라 무척 난감했을 게 아닌가.

며칠 전에도 내가 퇴근을 하고 대문을 열자 토리가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다. 토리가 가까이 가는 것은 남편뿐이다. 그래도 내 차 소리가 나면 마중을 나오기는 했다. 전에 청이는 내가 퇴근을 할 때에도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서 턱을 쓸어줄 때까지 기다리고는 했는데 토리는 얼굴만 보이고 곧 들어간다. 그러나 토리를 서운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내가 토리에게 해 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멀찍이 거리를 두는 토리의 방식이 더 편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토리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토리가 나가서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하며 토리를 불러보았다. 그런데도 기척이 없다. 집 뒤로 돌아가 보니 거기에 있었다. 왜 마중을 안 나온 걸까? 요 며칠 사이로는 남편이 퇴근을 했을 때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보통은 주차장으로 와서 차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려 었다. 내게도 최소한의 예우는 해 다.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가는 것이다. 내가 부를 때는 오지 않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인사는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방식도 마음에 든다. 청이가 대문까지 나왔을 때는 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들어오면서 혹시 청이가 차 앞에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토리가 붙임성이 덜 한 거 아니에요?”
“아냐. 내가 나가면 졸졸 따라다니는데?”
“그래요? 다행이네. 혹시 충성심이 덜한 건가 해서요.”
“청이 보다 나아. 청이는 자아가 강하고 제 맘에 안 맞으면 나한테도 웅웅거렸잖아. 토리는 그렇지 않고 예의를 잘 지켜.”
원래 개는 한 주인을 섬긴다니 내게 까지 잘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래도 주인을 섬길 줄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가까워도 개는 개다. 사람으로 생각해서 너무 마음을 놓거나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청이를 사람 같이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옳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같이 사는 개들이 다 사람 같다. 웅이는 약간 부족하고 서툰 사람 같고, 토리는 영민하고 사철한 사람 같다. 그리고 강이는 파파 할머니다.

우리가 뒷산으로 산책을 갈 때 어느 틈으로 나와서 우리를 앞질러 가던 청이 생각이 난다. 온 동네 산을 다 가 보았을 청이, 우리 퇴근 시간쯤 대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마중을 해 주던 청이, 동네 사람 얼굴을 다 알던 청이, 강아지 때 우리 집에 와서 죽을 때까지 마당을 다스리던 청이. 그리고 어느 날 거짓말 같이 생을 마감한 청이. 청이가 죽었는데도 마당엔 아무런 동요도 없고 오히려 토리는 자유를 얻었으며 우리는 쥐 걱정을 덜게 되었 . 청이가 살았던 십여 년 세월은 다 무엇이었을까. 생이 참으로 덧없다. 마치 실제처럼 생생하였으나 깨고 나면 실체가 없는 꿈 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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