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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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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Jan 26. 2021

남편의 집

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단순한 건물 만이 아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가정, 휴식처, 생활공간,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삶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과 내가 세상을 뜬 뒤에도 집은 우리를 대신하여 남을 것이고 아이들이 오가며 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집을 짓고 사는 남편과 나의 로망이다. 그런데 근래에 나는 생각이 좀 변했다.
 
전에 유튜브에서 매우 인상 깊은 포스팅을 본 적이 있다. 캐나다 토론토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어느 날 한 노인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96세의 할머니인데 매우 망설이면서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집을 내놓았다 한다. 집은 그 할머니가 직접 인테리어를 하였고 72년 동안 특별한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얼마나 관리가 잘 되었던지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그 집이 지어진 당시로 시간여행을 한 듯 경이로웠다고 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 나이에, 거의 일생을 살아온 집을 어떻게 팔려는 것일까? 평생을 살아온 만큼 가족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텐데 그 집을 떠날 마음을 어떻게 먹게 되었을까? 그 할머니가 몹시 망설였다는 것은 백번 공감이 가는데 결국 내놓기로 한 것은 어떤 마음일까? 나라면 아마 그런 큰 결정을 못했을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길모어 걸스'를 보다가 거기서도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로렐라이의 엄마(로리의 외할머니)가 혼자되었을 때 남편과 살던 저택을 처분하고 작은 집을 새로 마련하여 나간 에피소드였다. 캐나다 할머니의 경우든 길모어 걸스의 이야기이든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당연히 정든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려할 것이고, 설령 건강 등 여러 가지 형편으로 나가서 산다 해도 집을 팔지 않고 가족들이 공유하는 기억으로 남겨두려 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집에 대해 결정적으로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십수 년 전에 제작된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타샤 튜더가 세상을 떠난 5개월 후에 제작된 것이다. 둘째 아들 내외(둘째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다)가 그녀의 집과 정원을 돌아보며 어머니를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타샤는 삽화가이며 동화 작가로 생전에 미국 버몬트 주의 산속에 19세기 식 농가를 짓고 수도나 전기 시설 없이 살았다. 그녀의 자연주의 생활방식과 아름다운 정원은 세계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책에서 보았던 그 정원의 모습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돌보는 이가 없어졌다 해도 이제 몇 달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저렇게 퇴락되다니, ‘타샤의 정원’은 말 그대로 ‘타샤’의 정원이었던 것이다. ‘타샤’가 없으니 더 이상 ‘타샤의 정원’이 아니었다. 제작진의 의도는 그걸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그게 눈에 보였다. 내가 그걸 보고 느낀 감정은 실망도 슬픔도 아니고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 사는 우리 집이 '남편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건축비로 본다면 내 돈도 반은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의 계획과 아이디어에 따라 지었고, 마당의 돌도 자신이 직접 깔았고, 나무도 일일이 사다 심었다. 그리고 단독주택에 산다는 것은 집 관리를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가끔 지하수 수중 펌프가 고장이 나기도 하고, 번개가 치면 전기가 나가기도 하고, 보일러가 고장 나기도 하고, 장마철 전에는 배수로도 치워 놓아야 하고, 겨울이 되기 전에 마당의 수도꼭지도 물을 빼놓아야 하고, 인터넷 선은 어디에 묻혀있는지, 배전반의 복잡한 선은 다 어디에 연결이 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거기다 봄에는 나무들 전지도 해야 하고, 잔디는 이 주일에 한 번은 깎아야 하고, 뒤돌아서면 자라 있는 잡초들도 뽑아야 한다. 그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마당에 꽃을 몇 가지 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나 그 마저도 일삼아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남편은 내가 없어도 이 집에 살 수 있지만 나는 남편이 없으면 이 집에 살 수 없다고. 그래서 이 집은 남편의 집이다. ‘타샤의 정원’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타샤’의 정원이었듯이 이 집도 그 누구의 집도 아닌 '남편의 집'인 것이다.  
 
그러다가 영상에 다시 잘 손질된 집과 마당이 비쳐졌다. 반가워서 살펴보니 그 집은 타샤의 집이 아니라 막내 딸네 집이었다. 결혼해서 근처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타샤의 정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정돈되고 생기 있는 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한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둘째 아들네 집, 큰 딸네 집, 그리고 다 함께 모여 즐겁게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다들 보기 좋았다. 어머니 타샤가 가꾼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그 자녀들은 자신들의 삶이 있었다. 타샤가 죽은 후에는 그 아름다운 정원도 집도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자녀들은 각자 그 자신의 몫을 가꾸고 산다는 것, 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집도 나중에는 필시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남길 수는 있지만 자식들은 그들대로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행복할 것이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집을 가꾸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퇴락해 가는 것을 두고 보라고 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모두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캐나다 할머니나 로리 어머니의 결정이 놀랍지 않다.
 
나는 남편도 이 사실을 깨달았으면 싶다. 만약에 그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남편 살아생전에 이 집을 좀 더 관리하기 쉬운 집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당에 대해서는 정리할 것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집을 팔고 더 넓은 땅을 사서 더 작은 집을 짓고 싶다. 땅에 나무를 심어서 푸르른 휴식을 제공하되 큰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하고 마당과 집은 작게 만들어 아들이 건사할 수 있게 해서 주말주택으로 쓸 수 있도록, 또는 내가 혼자가 되더라도 남편 도움 없이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 집을 다시 짓는 일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법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퇴직만 하면 그동안 미루었거나 생각만 하던 일을 다 하겠다는 남편이 무리하지 않고 몸을 아껴서 이 집에서 오래도록 살기를 바랄 뿐이다. 남편이 건재하는 한 나도 '남편의 집'에서 걱정 없이 살 것이다.
 
#양선생각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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