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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Nov 05. 2024

나는 자유인이다.

퇴직타령 3

티브이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가 있다. 남편이 애청하던 프로그램이다. 남편 퇴직 무렵부터 해서 한 삼 년간은 열심히 보았.


나는 사회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 역할과 직무가 회수되었다. 그래서 더는 속한 조직이 없다.  이름은 있지만 직함이 없고, 오라는 데도, 해야 할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유○○ 선생님'으로의 역할은 없어졌어도 '자연인 유○○'의 생활은 지속된다. 그래도 나는 남편이 선망하는 자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서 구별을 짓기 위해 '자유인'이라는 말을 쓰겠다. 이를테면 '사회적 자유인'이다. 나 자신을 그렇게 이름 짓고 보니 퇴직 후 혼란했던 정체성이 비로소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에게 들었다.

"퇴직 후 첫날이 중요해.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갈 곳이 없으면 당황스럽거든. 그러니까 그날 집에 있지 말고 여행을 떠나요."

그래서 나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심리적 적응을 위해서 퇴직 첫날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깨고 그날은 집에서 쉬었다. 예정에 없던 휴기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은 남편이 짠 계획대로 차를 타고 멀리 나갔다. 쌍계사, 박경리 문학관이 있는 소설 토지의 배경 평사리, 조영남이 노래한 화개장터를 돌아보고 근처에서 하루 묵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군데를 더 들러서 천천히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나는 그 짧은 여행에서 깨달았다. '이건 휴가가 아니구나!' 휴가처럼 달콤하지도 시간 지나는 게 아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숙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던데... 선배 인은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며 남편과 자전거 라이딩 을했다. 사진을 보았는데 아주 멋졌다. 동기 한도 제주도에 한 달(두 달?) 머물면서 내외 동반해서 같이 간 친구들이 쌍쌍이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을 퇴직을 한 후배 윤은 보랏빛 맥문동 꽃이 수없이 피어난 숲에서 유유자적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골프를 치는 이교장도 남편과 함께 제주도에 월세 집을 구해 골프를 친다고 했고, 누구는 외국 여행 중이라 연락도 안되고, 또 누구도 그렇고 누구도 그렇고 다들 새로 시작된 즐거운 인생을 구가하느라 정기모임도 제대로 성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들 퇴직자들이 더 바뻐? 현직자는 꼬박꼬박 참석하는구먼.'

'아니야, 자기도 퇴직 해봐. 배울 것도 많고 진짜 더 바뻐.'

먼저 퇴직한 친구들의 지혜의 말씀이다.


퇴직하고 뭘 그렇게 배운다는 건지, 특히 교직에서 퇴직한 이들이 그렇다고 한다. 친구들이 가장 많이 권하는 것은 파크골프다. 골프보다 접근이 쉽고 골프만큼 재미있다고 한다. 곡교천 변에 있는 파크 골프장에 가보기도 했다. 시설도 좋고 재미있어 보인다. 나는 한국무용을 배우고 싶은 생각도 있다. 기타를 더 배우고 싶은 생각도 있고, 시나 시조를 배우고 싶기도 하다. 영어공부도 더 해보고 싶고 중학교 수준의 수학공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영어공부는 어느 정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수학 공부는 아무에게도 공감을 못 얻었다.) 나에게 시니어 모델 과정을 적극 추천하는 사람도 있고, 중학교 은사님인 이OO 선생님은 수필가, 시인을 거쳐 지금은 소설을 쓰고 계시고, 동기 정, 선배 인도 시인으로 데뷔를 했다.


나도 이젠 그 대열에 합류를 해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문제는 어떤 것에도 적극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마치 밤하늘의 달이 밝고 아름다워도 정작 내 방으로 끌어들기는 어렵. 내 방밝히려면 등불이 필요하다. 남들은 내게 말한다. '기는 글 쓰잖아. 그러면 되지.' 오래전부터 내가 생활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게 나의 등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꾸준하지가 않다. 마음 내킬 때 띄엄띄엄 쓰던 글들도 오히려 시간이 많아진 지금 의욕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두 페이지의 글을 쓰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몇 시간씩 자판과 모니터에 잡혀 있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까 퇴직 후 나의 심리적 상황을 정리하면 '뜨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근무하느라 시간이 없을 때는 하고 싶은 일이 많기만 하더니 시간의 제약이 사람진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지...


나는 이것이 퇴직 후 당분간의 특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 생활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오늘은 지난 감기 후 아직 남아있는 코의 염증과 잔기침을 해결하려 동네 의원에 다녀왔다. 시간은 열한 시 반쯤 되었다. 병원은 대부분 한 시부터 점심시간이니 그 시간에 가도 충분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니 아무도 없어서 바로 진료를 받고 나왔다. 현직에 있을 때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 때나 아무 절차 없이 병원이고 슈퍼고 미용실이고 간에 내가 필요한 곳을 갈 수 있다. 정말 편리하고 신기한 일이다. 특히 좋은 것은 이렇게 맑은 가을날,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한낮의 거리를, 차를 타고 맘대로 달려도 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현직에 있을 때 그렇게나 동경하던 일이 이젠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갑자기 퇴직 이후의 삶을 내가 좋아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제 차차 안정이 될 것이다. 이런 자유는 내가 아주 오랜 세월을 들여 얻은 귀한 이다.  나는 청신호가 들어온 신호등 아래를 지나며 살짝 웃었다.

'나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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