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행정실 주무관과 나눈 이야기가 있다. 언니 아들이 주말에 자기 집을 방문했던 이야기다. 언니 집은 고향인 홍성에 있고 그 주무관은 천안의 한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신혼을 꾸릴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집을 언니가 한번 보러 오면서 조카를 데리고 왔다 한다. 조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이모를 잘 따라서 가끔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조카를 보내고 나서 조금 슬펐다고 한다. 그 슬픈 사연은 조카가 집으로 갈 시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순순히 대답을 하고 엄마를 따라나섰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더 놀다 간다고 떼를 쓰곤 했는데 어제는 아무 말 없이 따라나서더라고요."
그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 말했다.
"그게 좀 슬펐어요. 이제 많이 큰 것 같아서..."
내가 서울에 2주 머무르는 동안 호수를 보러 가지 못했다. 물론 주말에 아들 가족이 놀러 오기는 했지만 날마다 호수를 마중 나가는 일과는 하지 못했다. 남편이 내 역할을 대신해주어서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집에 내려오기 전날 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은 할머니가 데리러 갈게. 학교 앞에서 만나!"
그런데 그 내일에는 아들이 출근을 하지 않으니 호수 마중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금요일이어서 호수가 쿠킹클래스를 하는 날이라 늦게 끝난다. 그러면 제 엄마가 퇴근하면서 데려오기 때문에 나의 역할이 없는 날이다. 그런데 호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 저 학교 끝났어요."
금요일인 것을 깜박하고 평소의 루틴대로 전화를 한 것이다.
"호수야, 오늘은 영어학원 먼저 갔다가 학교 가서 방과후 수업 하고 와."
"아 참, 깜박했어요."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것이 호수의 통화스타일이라 바로 끊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할머니!'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받아쓰기 시험 50점 맞았어요."
"뭐? 어떡해~!"
"오늘 친구들도 다들 점수 낮게 받았고 100점 맞은 친구가 4명밖에 없었어요."
"그랬어? 어제 할머니랑 같이 공부했으면 훨씬 더 맞았을 텐데 혼자 공부해서 그런가 보다."
지난번에는 95점을 맞았었다. 10문제라서 원래 5점을 주는 배점은 없는데 아마도 띄어쓰기가 틀렸을 것이다. 할아버지랑 공부할 때는 두 번 다 95점을 맞았었다고 한다.
"네, 할머니. 제가 잘 할게요."
기대하지 않았던 통화를 마치고 남편에게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어쩐지 호수가 그사이에 좀 큰 것 같다..."
앞으로 호수의 앳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까? 학교 마치고서 내게 전화를 하는 나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 벌써 3학년이니 이제 곧 공부가 많아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제 엄마의 퇴근시간에 근접해지면 나의 역할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손녀인 세하가 내년에 일 학년에 들어가니 세하에게 해 줄 일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그런 시절도 2,3년이면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외손자 도현이는 물리적 거리가 있어 크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한 채 어린이가 되고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커서 각각의 몫을 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지금의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깝고 아쉽기도 하다. "제가 잘할게요." 호수가 이런 말을 하다니 마음이 짠하다. 아무 걱정 없이 놀고 웃고 떠들고 뛰는 어린시절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