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아이, 겨울아이, 그리고 어른 하나

by lemonfresh

아침에 세하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차를 같이 타고 나가는 길이었다. 춥고 흐린 전형적인 겨울 아침이다. 지하 주차장을 막 벗어나서 거리로 접어드는데 세하가 말했다.

"할머니 난 이런 날이 좋아. 햇빛 별로 안 비치는 날. 바람이 불면 시원하기도 하고. 내가 이럴 때 태어났잖아."

세하는 일월 하순에 태어났고 다다음 주에 생일이 돌아온다.

"그래? 이런 날씨가 좋아?"

일반적으로 좋은 날씨는 아닌데 세하는 좋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흐린 날을 좋아한다기보다 활짝 밝기 전의 아침 느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딩을 끼고 코너를 돌자 밝은 햇살이 차창으로 비쳐 들었다. 날씨가 흐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늘 속에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렇게 밝은 게 좋지 않아?"

고도가 낮은 겨울 햇빛이 눈으로 쏟아졌다.

"아니. 아니야!"

세하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나는 차양을 내려 햇빛을 가렸는데 세하는 키가 작아서 차양이 소용없었다.


* * *


호수는 요새 방학이다. 세하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면 호수와 지내는 시간이다. 호수네 집은 안방이 가장 먼저 햇빛을 받고 차례로 거실 세하방 호수방 순으로 빛이 이동한다. 맨 마지막 해가 호수 방에 드는 것이다.


어느 날 오후에 호수와 둘이 집에 있으면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호수가 나를 불렀다.

"할머니, 얼른 와. 내 방에서 같이 있어요."

"응? 왜?"

"지금 내 방이 제일 좋아요."

오후 햇빛이 함뿍 들어 환하고 따스했다.

"그래. 좋아!"

넘어가기 전에 같이 앉아 볕을 쬐었다. 호수는 팔월에 태어났다. 그래서 햇빛을 좋아하는 걸까?


또 어느날은 세하를 데려오기 전에(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할아버지 담당이다.) 얼른 저녁을 지으려고 분주한데 호수가 불렀다.

"할머니 빨리 오세요. 지금 봐야 돼. 썬 셋 에이드!"

노을이 지고 있는데 산 위에 붉은빛과 그 위의 하늘빛을 보라는 것이다. '썬 셋 에이드'는 지난여름에 서해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해저 터널을 지나 찾아갔던 한 카페의 시그니처 음료인데 아래부터 코발트블루, 노랑 빛, 주황을 거쳐 위쪽에는 노을의 붉은 빛이 얹혀 있다.

"어디? 아, 그러네. 썬 셋 에이드!"

푸른 바다 위의 썬셋은 아니지만 서산 위의 엷은 노을과 그 위 하늘 빛이 그때의 추억을 띄워 올렸다.

"호수 말이 맞네. 지금 봐야 되네."

잠시 머물었는데 햇빛이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호수에게는 지난여름의 추억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 호수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꺼내놓지 않는 추억이다. 나는 겨울해가 지는 짧은 시간을 온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저녁밥 짓는 일에 복귀했다. 어른들이란 대체로 그렇다. 언제나 바쁘고 코 앞의 할 일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리고 내 생일은 봄이다. 해에 따라 벚꽃이 피었을 때도 있고 떨어졌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벚꽃 피는 봄도 좋고 낙엽 지는 가을도 좋다. 여름은 늘 지나간 다음에 좋아지고 겨울은 주로 따뜻한 창가에 앉있을 때 좋아한다. 세하가 흐린 겨울날이 좋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세하의 손을 잡아 보았다. 손이 아주 따뜻했다.

"세하 손이 따뜻하네. 좋다!"

세하가 말했다.

"할머니 손은 시원하네. 그래서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