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양선생활

대답을 하시오!

by lemonfresh

예방접종을 하러 갔다. 주사를 맞고 나서 십오 분을 기다렸다 가라기에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옆에 여자가 말을 걸었다.

"아프지 않았어요? 아까 주사 맞는데 아파하지 않던데?"

사실 그렇기는 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는 몰랐다. 겁이 나는 것으로 말하면 나 같은 겁쟁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사항을 다 들었다 싶을 때 왼쪽 어깨를 꼬집는가 싶더니 벌써 주사를 맞고 말았다. 살을 모아 집어 거기다가 놓은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어느새 상황이 끝났다. 주사를 이렇게 쉬이 맞아 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간호사가 의자를 가리키며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혹시 이상 반응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먼저 주사를 맞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들 휴대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는데 그때 옆의 여자가 말을 걸었던 거다.

"네. 아프지 않았어요."

"나도 금방 차례 오는데 아이구 겁나라."


그때 간호사가 어떤 이름을 불렀다. 옆의 여자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와 똑같이 주사를 맞았다. 백신 종류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말해 주다가 한 손으로 왼팔을 꼬집고 그 위에다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스티커를 붙여주고 저쪽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다.


주사를 맞은 여자가 다시 옆으로 왔다.

"저 간호사 주사 잘 놓네. 쉽게 잘하네요."

"네. 그렇네요. 아프지도 않고."

여자는 처음 보는 사이에 참 붙임성이 좋았다. 다들 아뭇소리 않고 자기 휴대폰만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자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 친화력이 갑'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영역의 능력이 꽝인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 여자가 내게 물었다.

"아줌마는 후유증 겁 안 나요?"

"예? 뭐..."

사실 티브이에서 들은 이야기는 많지만 내가 기준을 삼은 것은 나보다 먼저 접종을 한 남편이었다. 아스트라제네카를 맞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 선생님들은 고생을 심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그랬다. 동생들 중에도 보건요원이라 먼저 백신을 맞은 막냇동생이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두통에 구토에 붓고 하혈까지 호되게 고생을 했다는데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이도 그렇고, 백신도 비교적 수월히 지나간다는 화이자를 맞고, 남편을 보니 가벼운 열감 외의 증상이 없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여자가 내게 다시 말했다.

"부작용이 심한 사람은 실신도 한다는데."

"아... 네..."

여자는 나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했는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저이도 말 끊고 휴대폰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나도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었다.

"어, 언니!"

아마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나 보다. 여자는 언니 보고 오늘 자기 집에 좀 올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이유는 자기가 백신을 맞았고 혹시 실신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가 밥이랑 반찬이랑 다 해 놓았기 때문에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언니는 그냥 오기만 하면 된다 등등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언니라는 사람이 안 오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내가 전화를 계속 걸어 보겠다, 실신을 하게 되면 전화를 해라, 누구보고 가 보라고 하겠다, 119를 부르면 된다, 혹시 모르니 현관문 비밀 번호를 알려다오.' 등등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는 눈치였다. 설명을 해도 원하는 대답이 없자 말이 더 길어졌다. 간호사한테 들었는데 혼자 있으면 안 되고 누가 와 있어야 한다고 했다(사실 나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 아마도 여자가 간호사에게 따로 물어봐서 들은 대답인 것 같았다), 그냥 아픈 거는 자기가 참으면 되는데 실신을 하게 되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누가 옆에 있어야 된다더라, 밥이랑 반찬이랑 다 해 놨다, 언니가 좀 올 수 없냐 등등


옆에서 듣는데 내가 다 부아가 났다. 만약 내 동생이 나한테 그런 전화를 했다면 "걱정 마라. 내가 가마."하고 단번에 대답을 했을 것이다. '언니'라고 하던데 진짜 언니이기는 한 건가? 어쩌면 그렇게 대답을 안 하고 혼자 자기도 모르게 실신할까 봐 두렵다는 동생에게 '실신하게 되면 전화를 하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보아하니 동생이 아무도 없이 혼자 살고 있구먼 언니가 멀리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러는 건지. 차라리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안된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을 하던지.


"비밀번호 0000야."

내가 옆에서 '신실할까 봐' 소리를 열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아무 소득도 없이 집 현관 비밀번호만 언니한테 알려주고는 여자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하소연을 나에게 했다.

"아니 나는 아픈 거는 그냥 참으면 되는데 실신을 하게 되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래서 그러는 거지......"

이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게 어려운가 보다. 나는 사실 예방 접종을 하러 오는 것도 남편과 함께 왔다. 저쪽에 멀찍이 앉아있는데 분명히 휴대폰으로 고스톱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편이 뒤치다꺼리를 해 줄 것이다. 마침 나는 기다리라는 시간이 다 되었기에 가도 되는지 간호사에게 물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갈게요. 살펴 가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 여자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언니 하고 절교하세요.'

정말 그 전화기를 뺏어서 내가 대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동생이 언니한테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대답을 안 해요?'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남편에게 농담 삼아 말을 했다.

"나 자다가 혹시 실신하는지 잘 좀 봐주세요."

"그려. 내가 옆에서 잘 볼게."

남편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았다.


아까 그 여자 생각이 난다. 오늘 밤에 그이가 그 야박한 언니나 119한테 전화 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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