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떤 순간들은 (그 당시엔 몰라도 지나고 보면)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옷에 수놓인 보석들처럼.
그런데 가끔은 정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
삶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그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우리만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
눈부신 순간들
나 살면서 찰칵 사진을 찍듯 남은 순간
“난 이제 다 컸어”
열두 살 슈퍼 가는 길에 번개처럼 어떤 생각 하고는
그 길로 다 컸다고 생각한 순간
내 삶은 열두 살로 완성되었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이상은 자라지 않아
당신 대체 몇 살이야,를 콧등으로 넘기고 사는 세월
학교에서 돌아온 나보다 먼저 마당을 차지한 햇볕이
텃밭이고 고양이고 다 먹어버린 뒤
나까지 먹으려고 벽을 타고 기어오를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때 먹혀버렸단 걸
수십 년 지나 겨우 깨닫네
수시로 마음에 펼쳐지는 공단자락
그늘만 옮겨다니며 아직도 그 위에서 사나니
골목길은 계속 돌고
수줍은 아이는 계속 숨고
갈라진 구름 사이 비는 뿌리고
몇 겹의 레이어 겹쳐진 뒤에도
소리와 냄새는 나이를 먹지 않아
눈부신 것들은 늙지도 않아
내 몸에 집을 짓고 사네, 어여뻐라
어여쁜 중 제일로 어여뻤던
눈 맞추고 날아간 새들아, 날아가서 더욱 생생한
우리 함께 재재거릴 때 ‘순간’도 새로 태어났네
모든 날들을 거느린 순간이 제왕처럼 우뚝 일어서
우리를 움켜쥐었네, 어떤 힘도 그보다 강력하지 않으니
제왕은 떠났어도 휘광은 남아
내 몸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네
눈부신 것들은 영영 사라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