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속에서
-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맞춤한 모자 하나가 있어
그속에 목을 감추었다
아무도 내 목을 보지 못한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는 거품이 부글대는 바다
유화물감처럼 생을 덧칠한 바다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햇볕에 말라간다
몽골고원 사슴의 흰 뼈처럼
말들도 유창하게 말라 바스라지고
먼 곳에서 걸어온 발들도 잠들지 못하고
모자 속에서 입을 다문다
갈 길도 없고 올 길도 없어
불타는 눈으로만 가득 차 있는 바다가
촛농 같은 가슴들을 뚝뚝 떨어뜨린다
이 소리들 거기서 흘러나온 게지
밤이고 낮이고 이 소리들
그 소리 얼려 모자 속에 넣는다
소리가 녹으면 흐느낄 테니
녹지 말라고 꽁꽁 싸매어 내 굳은 목 옆에 누인다
흘러도 좋을 날 소리로 흐르라고
수억의 눈 중에 하나의 눈이 모자 속에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