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에 관한 짧은 에세이 쓰기' 과제
내가 늘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는 쪽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에 초연해 보이는 사람, 이 고생의 증인이 자기 말고는 없다는 사실에 안달복달하는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단 한 명에게라도 팔자 좋은 사람으로 비칠세라 전전긍긍하며 살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관찰 예능 출연자처럼 나의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카메라가 꼼꼼히 담아 재치 있는 자막까지 덧댄 편집본을 스튜디오에서 패널들이 집중하여 장면 장면 뜯어보며 리액션 해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으니 글을 쓴다.
<나 혼자 산다> 클리셰대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할 것이다. 부스스한 얼굴로 이불을 걷어차며 화장실보다 먼저 향하는 곳은? 엄마 방이다. 침대로 달려가 엄마부터 얼싸안는다. 설핏 자고 있는 엄마를 배변 매트가 깔린 침대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옮겨 태우려면 매일 아침 이런 뜨거운 스킨십이 불가피하다. 비몽사몽간이라 한결 더 무거운 몸을 실은 휠체어를 조금 끌고 화장실 앞에 정차시킨 뒤, 다시 한번 으스러질 듯한 포옹으로 일으켜 세운 채 한 바퀴를 돌아 변기에 앉힌다. 앉힌다는 말에는 엄마의 다리 힘이 풀리기 전에 재빨리 온몸에 엄마의 체중을 지탱한 상태로 기저귀를 내리는 섬세한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무사히 자리를 조준해 주저앉은 엄마가 변기 양옆에 설치된 장애인용 화장실 손잡이를 붙들고 균형을 잡는 동안 나는 얼른 밤새 묵직해진 헌 기저귀를 처리하고, 필요한 부분을 샤워기로 대강 씻기고, 정수기로 달려가 물 한 컵을 떠다가 입에 대준다. 갈증이 가실 때까지 물을 삼킨 엄마가 입을 다물면 나는 컵을 다시 밖에 빼놓고, 대야를 엄마 왼손에 들게 한 상태에서 수건을 미용실처럼 엄마 목 주변에 둘러준다. 그리고 전동 칫솔모에 치약을 짜고 오른손에 쥐여준다. 절대 칫솔질만큼은 스스로 하겠다는 자존심 담긴 엄마의 양치는 전동칫솔에 설정된 2분 동안 지속된다. 2분 뒤 입에 있는 거품을 들고 있던 대야에 뱉으면 내가 이번엔 양치 컵에 물을 받아 여러 번 입에 대준다. 엄마 힘으로는 물이 채워진 컵을 쏟아지지 않게 붙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치도 볼일도 마무리되면 다시 역순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휠체어에 앉은 채 잠시 엄마 혼자만의 휴대폰 확인 시간을 갖는다. 나의 출근 준비는 이렇게 엄마의 아침 화장실 루틴이 끝나고부터가 시작이다.
이쯤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가 하루 중 30분에 불과한 도입부라는 점이다. 게다가 매주 목요일에는 부족한 신체활동 보충 차 재활 치료를 받으러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동행하기 때문에 훨씬 일찍 깨야 한다. 역시 재활이 끝나고선 집에 엄마를 데려다 놓고 출근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때로는 전쟁 같은 본업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난다는 말이다!(누굴 향한 호통인가.) 물론 평일 회사에 있는 동안은 오전, 오후 두 분의 요양보호사님께서 각각 세 시간씩 와주시는 덕분에 일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 묘사한 아침 시간 이후로도 퇴근 후와 휴일의 내 일상은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만큼 엄마와 밀착될 수밖에 없다. 100권에 육박하는 번역서를 출간한, 집 안팎에서 재미와 지식을 뽐내고 다니는—팟빵 같은—엄마였지만 이제는 일은커녕 사소한 동작 수행도, 이를테면 차려놓은 밥을 먹는 일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온전히 내 차지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보더라도 따로 집에 와주시는 분이 없다면 길어야 세 시간 단위(화장실 텀)의 외출이 가능하다. 이 단순한 제약이 이전의 삶과 큰 차이를 만들었다.
한참 전 언니의 독립 이후로 쭉 내게 유일한 동거인인 엄마에게 균형 감각이 상실되는 소뇌위축증 진단이 내려진 2016년부터 증상이 서서히 악화되어 해야하는 일도 차츰 늘어났다. 반면 점점 요령이 생겨 몸에 익는 부분도 많고, 장애등급이 높아져서 오후 요양보호사님까지 큰 부담 없이 모실 수 있게 됐고, 다행히 인지 기능에는 지장이 없어 어눌하게나마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힘들기만 한 시간이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문득, 인생에 있어 결코 짧지 않은 비중의 이 시간이 엄마랑 나 둘밖에 모르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아득하게 고독하다. 결국 엄마는 떠나고, 이 기쁨과 슬픔은 평생 나밖에 모를 거라는 사실이. 말 주변이 없고 그 사실을 내내 의식하며 사느라 누군가에게 장황하게 털어놓는 일이 어려워서 더욱 갑갑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치고 그러면 난 대체 누가 내 일상을 알아줬으면 하길래, 이렇게 손가락에 빨간 구두를 신은 듯 급발진하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키보드로 두드리게 되는 것일까.
• 사적으로는 간략한 정보만 주고받는 사람들 : 아예 공적인 대화만 나누는 사이라면 걱정 없다. 문제는 길게 얘기할 사이는 아닌데, 사적인 대화에 진입만 하게 되는 경우다. 그들에게 나는 삼십 대 중반이 되도록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집에서 편히 사는 미혼 여성으로 보일 따름이다. 집안일로부터는 대체로 자유로울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다는 점이 가장 분하다. 일하면서 가볍게 서로의 신상 정보를 묻는 시간은 자주 온다. 의례적인 상대방의 질문에 혼자 살지 않고, 결혼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 부모님이랑 사시는구나?”라고 되묻곤 하는데 차마 “아, 부모님은 다섯 살 때부터 따로 사셨고요, 여섯 살 많은 언니는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진작에 독립했는데, 워낙 어려서부터 엄마랑 부딪히는 부분이 커서 따로 살고 훨씬 사이가 편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을 얻으셔서 제가 모시고 있고요. 전 집안일도 바깥일도 꼬박 두 사람 분을 하고 있다고요.” 이렇게 구구절절 정정할 수 없고, 엄밀히는 부모님이 아니라 ‘모님’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냥 “아.. 네”라고 대답하고 나서는 저 사람은 나를 캥거루족 프레임으로 바라볼 거라는 생각에 혼자 속으로 가슴을 친다. (대부분은 단지 시간을 때우는 질문이었을 뿐 실제로 나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도 못할 확률이 90%에 가까울 텐데도 말이다.) (+캥거루족 출신으로서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비틀린 생각이고, 엄마 소유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여전히 맞기도 하다.)
• 육아 근황을 나누는 사람들 : 나는 아기였을 때부터 아기를 좋아했을 정도로 소문난 영유아, 어린이 마니아인 만큼 당사자가 아님에도 육아 토크에 흥미롭게 참여하는 편이다. 아이들이 크는 과정을 먼발치에서나마 간접 체험하는 일이 흔쾌하다. 하지만 내 돌봄의 고충만큼은 매번 화제 바깥에 있다는 점이 속상하다. 육아를 하는 동료들은 점심시간이나 회의 전 스몰토크로 본인의 돌봄 이야기를 공공연히 테이블에 꺼내놓을 수 있다. 반려동물 이야기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럽고, 사고뭉치이고, 똑똑한 우리 엄마는? 나도 거리낌 없이 고충과 귀여움을 나누고 싶다. 내가 엄마 얘기를 꺼내면 대개 분위기가 침체된다(고 느낀다). 일상의 비중 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이 나이 먹고 계속 엄마 얘기만 하는 게 좀 멋쩍게 느껴지기도 해서 지레 자제하는(것이 이 정도..) 경향도 있다. 한 번은 주말에 몇 명이 같이 일터에 나와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 동료는 얼마 있다가 어린 아기를 배우자가 돌보고 있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니 뒤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저는 엄마가 화장실도 꾹 참고 혼자 있는데요?’라는 말을 누르고, 그러시냐고 먼저 가시라고, 저도 곧 마무리하고 가보겠다는 말만 했다. 육아는 떳떳하고, 자연스럽고, 흥미롭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반면 나의 돌봄은 부연 설명이 장황하고, 와닿지 않고, 어둡고, 무겁고,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사무치는 순간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채널예스 매거진에서 박연준 시인이 정확히 짚어준 바 있다.
“아주 많이 늙은 것과 아주 많이 어린 것, 그것은 동급이다. 둘 다 많은 시간을 누워 보내며 인지 능력이 떨어진다. 스스로 먹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다. 둘 다 몸이 약해 바이러스에 취약하며 극진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세상 속에서 더없이 약한 존재다. 다만 한 쪽은 사람들의 호의와 감탄, 애정 어린 시선에 둘러싸여 자라고 다른 한 쪽은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한숨, 걱정에 둘러싸인 채 쇠락한다. 아기의 모습은 자랑거리가 되고, 노인의 모습은 누추한 이불속 얼룩처럼 가려지기 일쑤다.” (모든 인간은 자라서 노인이 된다, 박연준)
그밖에 오히려 본인의 아이를 돌봐줄 만큼 건강한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에게도 그들이 얼마나 복 받은 건지 말해주고 싶다. 당사자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냐마는 배 아프도록 부러워서 그렇다. 모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 세대에 걸쳐 돌봄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친구들의 부모님에게 괜스레 마음을 이입한다. 아이 돌봄에 대해 무지몽매한 입장이면서 말이다. 내 고생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대상을 이렇게 열거할수록, 노인 돌봄 영역에 있어 배배 꼬인 꼰대 같은 마음을 품고 구시렁거리며 일상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표면은 잔잔해 보이지? 이 속에서는 엄청 거친 물결들이 일렁이고 있는 거야.” 13년 동안 함께 일했던 전 직장 상사는, 사무실의 매일이 평탄해 보이지만 구성원들 하나하나 각자의 고민과 문제를 감추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누군가는 실연의 아픔을,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슬픔을, 집안의 대출이나 가족의 건강 문제를 안은 채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매일의 할 일로 들어가면서 복잡한 내면에서 잠시 빠져나온다. 공적인 자아를 꺼내어 수행할 때 우리는 개인으로서 처한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각각의 차가운 발을 잠깐 잊어버린다.’
황선우 작가의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읽다가 밑줄 치는 걸로 부족해 필사한 부분이다. 모두가 공적인 영역에서 일일이 사적인 고충을 나누지 않는다. 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차가운 표정을 애써 유지하고 있는 나처럼, 나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말하지 않는 괴로운 사연에 대해 나는 쥐뿔도 모르면서, 오늘도 나의 고뿔에만 심취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