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하루살이의 점심산책 7
일곱번 째 산책
#정동 #고종의길 #덕수궁돌담길
남들보다 조금 긴-점심시간 200% 활용기
다소 불친절한 나만의 기록
충정로-정동 도보 왕복 30분
제임스 게일(1863~1937)는 캐나다 선교사로 1888년에 조선에 왔다. 그는 서울에만 머무르지 않고 틈만 나면 부산, 개성, 평양 등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조선에 입국한지 10년만에 1898년 미국에서 <코리안 스케치>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간했다.
당시 개항장인 인천에서 도성으로 오는 길은 육로로 한강에 이른 뒤 양화진을 거쳐 돈의문으로 들어오는 길이 가장 빨랐다. 1882년부터 서양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과 유럽인들도 거의 이 길을 택하였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을 필두로 각국 공사관이 돈의문 인근 정동에 자리 잡게 된다. 이는 경운궁(현 덕수궁)과의 인접성뿐만 아니라 이 같은 교통 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일대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외교의 중심지역이었다.
'서울 Seoul'이라는 설명문만 붙은 아래 사진은 코리안 스케치의 서문에 실려있다. 아직 경운궁(현 덕수궁)이 재건되기 전의 정동일대의 모습이다. 서양인들의 주거지로 한창 변모가 시작된 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남산 자락이며 미국, 영국공사관이 자리한 언덕이 가까이 보인다.
정동사거리는 정동과 광화문, 강북삼성병원, 서대문역 네 방향의 교차로다. 정동사거리에는 맥도날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신촌 맥도날드도 없어진 마당에 정동사거리 맥도날드는 일찍 감히 사라졌다. 야간자율시간에 먹었던 맥플러리가 생각나는 거리다.
정동은 구한 말 외교의 중심지였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외국 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는 열강들 사이의 외교 정보를 수집하고 조선 정보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이곳 정동으로 모여든 것이다.
캐나다 대사관
: 서울시 중구 정동 16-1
캐나다와 한국의 관계는 1888년 토론토 출신의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 (James Scarth Gale)이 한국에 파송되며 시작되었다. 게일 선교사는 한-영 사전을 최초로 출간하고, 최초로 영어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캐나다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전통적인 우방으로 1963년 한국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10년 후 1973년 처음으로 한국에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프랑스 공사관 터 (현 창덕여자중학교)
: 서울시 중구 정동 28
정동 28번지에는 프랑스대사관이 있었다. 1836년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현 관수동 126번지에 있던 프랑스 대사관은 1889년에 정동지역으로 터를 옮겼다.
옛 프랑스 공사관은 1895년 프랑스 건축가 쌀르벨르가 바로크풍으로 설계하였다.지하 1층, 지상 2층의 본체와 5층 옥탑으로 이뤄진 적벽돌 건물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 뒤 총독부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35년 서대문고등소학교 확장에 따라 헐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창덕여중이 정동으로 이전됐다. 최근 2010년 신축터 교내 운동장에서 옛 프랑스 공사관 터의 지하실 유구와 도심 서울 성곽의 기단부를 발견하였다.
미국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 서울시 중구 정동 10
1882년 미국과 한국 양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는 한국이 서방 국가와 맺은 첫 번째 외교 관계이기도 하다. 1883년 미국은 루셔스 하우드를 최초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1972년 옛 대사관저가 붕괴 위험에 직면하자 미국 정부는 역대 미국 대사들의 100년 동안의 숙원이던 '서양식 건물'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1971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한 필립 하비브는 '한옥 양식'을 고집했다.
다시 이어진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돌담길은 총 1100m이다. 영국대사관으로 인해 170m 구간이 가로 막혔었다. 서울시와 영국 대사관의 협상 끝에 2017년 8월 100m 구간이 개방되었고 2018년 12월 나머지 70m가 시민에게 열렸다.
폭이 좁은 이 길은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 경희궁으로 가기 위한 주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영국대사관
: 서울시 중구 정동 04
1883년 한국과 영국은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1884년 영국 총영사관을 설치한다. 미국공사관에 이어 두 번째로 정동에 터전을 잡게 된다.
영국대사관은 옛 정릉(貞陵)이 있었던 터로 알려져있다. 영국의 외교공관은 오롯이 한 장소에만 머물렀다는 점에서 의미를 크게 가진다.
고종의 길
고종의 길은 1886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피신했던 아관파천의 통로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진다.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해당 영역이 우리나라 소유가 되었다. 2016년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시작된 복원사업에 의해 이 길이 완성되었다.
구 러시아공사관
: 서울시 중구 정동 15–1
1884년 조선과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파견한 칼 위메르에 의해 조로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었고 고종은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러시아는 정동에 공사관을 세웠다. 러시아 공사관은 경운궁을 비롯한 도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녔다. 이를 이용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주변공사관들을 견제하고자했다.
1885년 세워진 러시아 공사관은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설계되었다. 벽돌로 된 2층 구조로 한쪽으로 탑을 세웠다.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채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
정동구락부는 구한말 서울 정동에 있었던 구미인과 조선 개화중심의 사교모임이다. 1894년(고종 31) 사교와 친목 등 비정치적인 성격을 표방하며 설립하였다. 이들은 정동 소재 손탁호텔(사저)에 모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친러반일 운동의 책략이 세워지던 곳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이었던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여동생의 남편이 러시아 주한공사인 웨베르였던 관계로 서기 1885년 웨베르 공사에 수종하여 경성으로 왔다.
미스 손탁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임금의 식사, 세화(돌보아줌) 등을 맡게된다. 미스 손탁에 대한 고종의 사랑이 남달라 왕궁의 조리부터 연회를 맡기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녀를 위해 토지를 사들어 가옥을 하사한다.
미스 손탁이 서울 사교계의 프리 마돈나로도 맹활약한다. 그녀는 정동구락부와 왕실과의 연락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손탁호텔은 서구식 호텔 영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풍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졌고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을 선보이게 된다. 이곳은 서울의 외국인 전용 호텔로 자리잡게 되었다.
손탁호텔은 1918년 이화학당에 매각되었다. 이를 매수하고 후에 헐어내어 신교사를 건축하였다. 1922년 프라이홀(frey hall)의 신축을 위해 다시 헐려지고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라이 홀은 1922년 9월 준공되었고, 1975년 화재로 전소되어 철거되었다. 지금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p.s. 내가 이화를 다녔을때, 우리에게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은 백주년 기념관 1층 벌레네 집에서 점심을 먹어보는 것이었다. (가게 이름은 Birds&Bugs였는데, 우리는 그곳을 벌레네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 직장인들이 너무나 멋있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장인이 되어 그 곳을 다시 찾았을 땐, <La Green>으로 바뀌어 있었다. 벌레네 집보다 훨씬 맛있고 좋지만,, 문득 떠오른다. 그 가게.
글.사진 전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