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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녜은 Oct 31. 2019

남대문 밖 칠패시장을 찾아서

충정로 하루살이의 점심산책 9

아홉번 째 산책

#칠패로 #칠패시장 #남대문


남들보다 조금 긴-점심시간 200% 활용기

다소 불친절한 나만의 기록

충정로-남대문  도보 왕복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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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이었다. 한양에 들어오는 10개의 길 중에서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과 이어진 5개의 길이 숭례문을 지나갔다. 

1940년대 초 촬영된 남대문시장 일대 항공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에서 가장 많은 물자가 반입이 되었고 사람의 통행도 가장 많았다. 남쪽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자의 대부분은 숭례문을 통해 운종가雲從街의 시전(수도나 도시에 기반을 둔 상설 시장) 등으로 공급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자들은 마포, 용산 포구-서소문, 남대문을 통해 운종가의 시전으로 공급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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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전차


1899년 종로에서 용산을 잇는 전차길이 생겨 전차가 숭례문을 관통하였다. 1904년에는 숭례문 앞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선로가 부설되어 숭례문은 사람, 마차, 말, 전차 등이 뒤섞여 지나가는 매우 복잡한 통행로가 되었다.

1903년 숭례문. 전차가 숭레문을 관통하게 되면서 말과 사람 등이 뒤섞여 매우 복합한 통행로가 되었다 ⓒ문화재청

1907년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후에도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성벽이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1913년 숭례문. 교통성벽이 철거된 모습.『MANCHURIA&CHOSEN』(THE IMPERIAL JAPANESE GOVERNMENT RAILWAY,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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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숭례문 구간


오늘의 점심산책의 주제는 '칠패시장을 찾아서'다. 칠패시장을 찾기 위해서 한양도성 숭례문길(구간)을 거쳐 숭례문 밖 동네를 다녀왔다. 중앙일보 건물 뒤에 위치한 소의문(서소문)터에서 시작하였다.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 구간 표지판(왼쪽), 소의문 터 표석 (오른쪽) ⓒ전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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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순성길


중앙일보 건물 뒷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숭레문이 나타난다. 이 길은 서울 한양도성의 성곽이 있던 길로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높게 자리잡고 있다. 옛 성벽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복원, 정비한 모습이다.

검게 그을린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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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성곽과 남산타워


대한상공회의소에 다다르면 복원된 성곽길이 끝나는데, 그 순간 남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남산의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내려앉은 산자락에 숭례문이 세워져 있어 그 일대가 주위보다 조금 높은 편이다.

성곽(?)길의 끝점에서 나타난 남산타워 ⓒ전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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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운 숭례문


1907년 교통의 혼란을 문제로 숭례문을 둘러 쌓아져 있던 성곽은 철거되었다. 2008년 화재 이후 복원작업을 통해 숭례문은 비로소 성곽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숭례문의 과거와 오늘. 오른쪽 사진은 1930년대의 숭례문으로 성곽의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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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패로 


칠패七牌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조선시대에는 한 무리를 지칭할 때 '패(牌)'라는 단위를 사용했다. 포도청의 순라군이 감찰하는 여덟 개의 패(牌) 가운데 이곳이 일곱번째 구역, 칠패(七牌)이다. 

숭례문 밖에 위치한 칠패. <서울지도>일부, 1902.  *사진=서소문역사박물관

칠패지역은 현재 숭례문 염천교 중림동 일대를 의미한다. 칠패로(七牌路)는 숭례문에서 염천교를 지나 서소문역사공원에 이르는 왕복 4차선도로이다.

ⓒ전녜은

칠패지역은 숭례문과 서소문 밖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 한양도성으로 유입된 인구가 거주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수요가 점점 커져 큰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좋은 입지였다.

ⓒ전녜은


행상이 모여서 물건을 바꾸고 헤어지는 것을 장(場)이라고 한다. 모두 네 곳이 있다. 종루가상 (鐘樓街上) ˙이현 (李峴)˙칠패(七牌)˙소의문외(昭義門外)이다.

『동국여지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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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패시장


조선시대 후기(19세기 초) 한양에서 가장 큰 시장 세 곳이 있었다. 이를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라고 일컬었는데, 남대문 밖-칠패(七牌) 시장, 종루(종로4거리), 흥인지문 안-이현(또는 배오개)이다. 

순화동 더 샾 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칠패시장터' 표석 ⓒ전녜은

여기에 추가로 서소문 밖을 더하여 사대시(四大市)로 보기도 한다. 또한, 숭례문 안 선혜청 창고 앞에 남대문 조시(朝市, 새벽시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칠패와 서소문 밖 시장은 생각보다 큰 규모였고 서울에서 손꼽히는 시장이었다.

칠패시장에서는 쌀, 어물, 포목(베와 무명)과 같은 품목이 거래되었다. 주로 어물이 거래되었다. 

ⓒ전녜은

칠패에서 판매한 어물의 가격이 어물전이라는 시전판매가보다 저렴하여 많은 행상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어물전의 유통물량의 10배나 될 정도로 거래가 활발했다.

풍속화가 김학수, 남대문 밖 칠패시장, 1994, 인제대학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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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교 수제화거리


염천교는 옛날 이 자리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焰硝廳)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는 염청교(焰廳橋) 혹은 염초청교(焰硝廳橋)라 하였는데, 그 소리가 변하여 염천교가 되었다. 

염천교 다리 아래로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찻길이 놓여져있다. ⓒ전녜은

염천교를 건너면서 낡은 상자형 4층 건물들이 길쭉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층에는 수제화 가게들이 있는데, 이 거리를 '염천교 수제화거리'라고 일컫는다.

ⓒ전녜은

광복 후 미군들의 중고 군화를 개조하여 구두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부터 19880년대까지 수제화의 전국 물량을 이곳에서 거의 다 제공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1970년대 간판에 관한 안내판 ⓒ전녜은

현재 칠패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칠패시장터' 표석만 있을 뿐. 칠패시장의 흔적은 지난번 산책에서 만난 '중림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림시장은 새벽시장으로 활발했던 곳이며 현재도 주로 '어물'을 판매했기 때문이다. 흔적 찾기는 언제나 즐겁다. 

옛 종로학원 자리 건너편에 중림시장이 위치한다. 공항버스 뒤로 놓여져있는 낮은 건물들이 중림시장이다. ⓒ전녜은



p.s. 이제 제법 낮에도 코 끝이 시리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전날의 미세먼지는 깨끗하게 물러나고 파아란 하늘과 시원한 공기가 나의 산책을 더 신나게 만들었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반대편에 지난번에 소개했던 서소문역사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칠패지역으로 가을 나들이 가즈아

염천교 수제화거리의 유니크한 카페문, 서소문역사공원의 벽돌과 파란하늘의 완벽한 콜라보 ⓒ전녜은


글. 사진  전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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