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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이생각 Jun 13. 2021

베짱이를 위한 개미의 변론

개미는 사실 베짱이가 되고 싶었다

여보, 나 은퇴하고 싶어.


직장인 2년차. 차라리 아직 1년차라고 말하고 싶은 나는 '하루라도 빠른 은퇴'라는 꿈이 생겼다. 안정적이라는 최대 장점만으로도 각광받는 직장이지만, 아직은 그 소중함이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빨리 은퇴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무엇이 그리 힘드냐고 묻는다면 매일 공들여 분석한 요인들을 논리 정연하게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은퇴가 답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애써 만든 변명들은 큰 의미가 없게 됐다. 직장인으로 살기 어렵게 만드는 내 안팎의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는 의지와 필요보다,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그 설렘이 이미 나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은 내가 마냥 순수하고 낙관적이지만은 않아서, 일단 그만두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겠다는 예술혼과 패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은퇴는 경제적 문제를 포함한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때에야 가능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던데, 또 다른 어려움을 맞닥뜨릴 각오는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만 최소한 경제적 안전장치는 마련이 되었을 때, 실천에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이 물었다. "은퇴를 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하자. 그럼 그때는 뭘 하면서 살 거야?" 남편을 당황시킨 내 대답, "그냥 먹고 놀려고 은퇴하지."

남편은 늘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걸 향해 나아가는 생산적인(또는 그러하게 보이는) 삶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집에서 하루도 빈둥대는 날이 없고, 쉬고 싶을 때는 주식 유튜브를 본다거나 책을 읽어서 뭔가 '생산적인' 휴식을 취해야 마음이 흡족한 그다. 학생 때는 나도 그런 성향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쁨을 깨닫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 중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하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며 뒹굴거릴 때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답변이다.


그래서 나는 경제적 안정이 전제된 은퇴를 할 경우, 당연히 마지못해하는 일은 벗어던지고 마음 가는 대로 하루를 구성할 상상에 부풀어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이곳저곳 여유롭게 돌아다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현재 기준, 내 마음이 가는 곳들이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은퇴를 하면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조금 더 마음이 편하고 더 즐거운 '다른 일'을 하는 줄 알았더란다. 혹시 용돈벌이라도 계속하라는 의미인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라 내가 '다른 생산적인 일'을 찾아다닐 줄로 생각했단다.


인간이 살면서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말로는 매일 먹고 놀기만 하겠다고 해도, 분명 또 어느 시점에는 성취지향적 미션을 세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남편의 말을 듣고 방방 거린 이유는 먹고 노는 것을 '비생산적인 무용한 짓'으로 치부해버린 데 있다. 개미 옆에서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가 하등 쓸모없게 보이는가? 내 눈에 베짱이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줄 아는 친구다. 어쩌면 노래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선한 영향력마저 갖춘 대단한 친구라고까지 포장할 수도 있다. 매일 자신을 채찍질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어려운 개미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베짱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죄는 아니라 믿는다.


먹고 노는 것? 현실이 받쳐주지 못하니 못한달 뿐이지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게, 베짱이를 동경하는 개미가 그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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