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딸은 산책을 좋아하는데, 나는 산보를 좋아한다. 녀석은 할머니와 산책을 나가면 아빠 몰래 달콤한 간식거리들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짬만 나면 할머니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졸라대는 눈치다. 나는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와 산보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망원동 시장의 구경거리들과 할머니와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백화점으로 시장으로 돌아다니는 산보를 좋아한다. 산보가 일본식 한자어라고 산책이라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확실히 일본에서는 산책보다는 산보라는 단어를 많이 쓰기는 한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셨던 할머니도 꼭 "산보 가자"라고 하셨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산보라는 말을 쓰고, 일본어 사전에도 산책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굳이 산보를 미워하고 산책이라는 말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산보는 글자 그대로 한가로이 걷는 걸음을 가리킨다.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일을 일컫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어떤 목적지에 가장 효율적으로 빨리 도착하기 위한 발걸음이 아니라,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는 것에 이 보다 더 적당한 단어는 없다. 산책은 지팡이를 짚고 한가로이 걷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의 경우 ‘꾀’나 ‘계획’의 의미로 쓰이는 책(策)이라는 한자가 산책에서는 드물게도 대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김삿갓처럼 죽립을 쓰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발길 닿는 대로 소요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딱 그 모습이 산책의 원래 의미이다. 혹시라도 내가 양손에 스틱을 들고 한동안 유행하던 노르딕 워킹을 한다면, 나는 토 달지 않고 ‘산책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내 상황은 그렇지 않아서, 난 오늘도 점심을 간단히 마치고 짬을 내어 여의도 공원으로 산보를 간다. 산보니 산책이니 하는 해묵은 심술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산책은 애당초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한 결과보다는 걷고 있는 과정이 중요하다. '어디에 갔다'는 것보다는 '발걸음을 옮기는 행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땀이 나도록 걷는 것을 산책했다고 하지는 않으니, 다친 다리의 재활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운동을 위해 산책하는 것도 아닐 터이다. 대신, 내 글쓰기 동료인 박혜원 님의 말처럼 무용(無用) 한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산책만 한 일이 없을 듯하다. 그저 짬을 내어 걷기 시작해서 원하는 길들을 거쳐 시작한 자리로 돌아오면 그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산책의 효용에 대해서 궁리하는 것 자체가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살포시 산책에 실용성을 더하는 주장이 있다. 한가로이 걷는 일이 우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스탠포드 대학교 마릴리 오페조 (Marily Oppezzo)의 연구이다. 오페조는 2014년발표한 연구 보고서에서 몸과 생각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을 통해, 신체적인 움직임이 인지능력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설명했다. 몸을 움직이는 동작 자체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체적인 움직임을 갖는 것이 브레인스토밍 같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좋은 산책로에 나가지 않고 창도 없는 실내에서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참신한 생각들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 다는 것이다. 유사한 연구 결과들에 근거해서 회사에 러닝머신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걸으면서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회사들도 있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꽤나 검증이 된 믿을 만한 주장인 듯싶다.
캘리포니아 에버노트社 사무실
사실 사색의 방법으로 산책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해왔다. 굳이 거창하게 니체가 말한 “모든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들은 걷기로부터 잉태된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상 앞의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간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철학자들이 즐겨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다는 독일의 ‘철학자의 길’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일본 교토에도 비슷한 이름을 가진 ‘철학의 길’이 있어 여행길에 가본 적이 있다. 교토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긴카쿠지부터 에이칸도 근처까지 약 1.5킬로미터의 관개 수로 옆에 조성된 작은 길이지만, 1890년 길이 만들어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온 걷기 좋은 산책로였다. 길의 이름이 주는 무게 때문에 이 길을 걷고 나면 삶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라도 하나 얻어서 나와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기기도 했다. 이 길은 예전부터 ‘문인의 길’, ‘산책의 길’, ‘사색의 길’ 등으로 불리다가 1972년 새롭게 산책로를 정비하면서 교토대학 출신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산책하기 좋은 길의 애칭이 사색이나 문인, 철학자 등과 위화감 없이 결부되는 것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전개인 듯하다.
교토 철학의 길 - 가을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보니 산책이라는 단어에 쓰인 한자들이 다시 눈에 밟힌다. 한가롭다는 뜻으로 쓰인 산(散)이라는 글자도 워낙은 흩어버린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만약 머릿속 상념의 잔가지들을 흩어버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걷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면, 산보라는 단어보다는 산책이 중의적이고 미묘한 뉘앙스가 더 살아있다고 한 발짝 양보할 수도 있겠다. 뭐든 상관없다. 한자 가지고 심술부리며 궤변이나 늘어놓을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딸아이의 예쁜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편이 훨씬 유용할 터이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사주셨던 단지 모양의 바나나 우유를 그 녀석도 좋아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