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즈옹 Mar 21. 2017

블랙스완

완벽을 향해 내던지고, 아름답게 부서지다

 1. 화면 및 효과 :  니나 및 발레 무용하는 장면을 뱅뱅 돌면서 따라가는 카메라와 점프를 따라가는 화면 등은 발레라는 무용을 관객으로서 보는 고정된 아름다움이 아닌, 무용수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발레는 역동적이며, 발끝으로 선 팽팽한 긴장의 연속인 무용이다. 이런 긴장감을 관절이나 근육이 자세를 유지하면서 나는 소리, 빳빳한 토슈즈가 하중 때문에 당겨지면서 나는 소리를 통해서도 전해준다. 


2. 니나 : 니나는 연약하고 순수한 캐릭터에서 일련의 혼란과 불안 끝에 유혹적인 흑조로 변화한다. 니나는 매우 유약하고 성장하지 못한 소녀적인 사람이다. 극 초반, 오디션 전에 베스가 분풀이를 하고 나온 대기실에 들어가서 립스틱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날 선 욕망 끝에 있는 주연배우라는 역할을 쟁취했을 때의 달콤함을 잠시 맛보는 모습으로 순수하기 때문에 욕망에 가장 강하게 이끌리고 물드는 니나라는 캐릭터의 시작을 보여준다. 

니나의 캐릭터를 말하는 데 있어서 성장하지 못한 소녀적이라는 말을 붙인 데에는 동경하는 대상의 립스틱을 훔쳐 바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니나는 립스틱을 바른 후 주연 자리를 설득하려 단장을 찾아간다. 그 때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권력자 앞에서 우물쭈물 작아지는 부당한 성폭력에도 보여주는 소극적인 모습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소녀의 모습인데, 이 배경에는 그녀의 엄마가 있었다. 


3. 엄마와의 애착관계 : 순수하고 연약하지만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인 니나는 엄마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엄마는 딸에게 헌신적으로 보이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딸을 옥죄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배역을 따낸 니나에게 케이크를 선물했다가 체중조절을 이유로 거절당하자 케이크를 버리는 장면이 있다. 니나는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의사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엄마를 달래 한 입 먹는 장면이 나온다. 불안한 엄마, 그리고 자신이 가진 딸로서 가진 죄책감을 중화시키는 착한 딸이라는 평화의 불안한 달콤함을 보여준다.

엄마는 임신으로 꿈을 포기한 전력이 있고, 그로 인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임신을 통한 꿈의 좌절과 함께 떠나버린 남편은 딸의 남자관계 및 성적인 부분까지 주시하고 관리하는 엄마의 집착의 근거가 된다. 

딸인 니나는 자신의 탄생으로 인해 좌절된 꿈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언제나 엄마의 꿈의 대리인으로서 만족을 주어야만 하는 사람으로서만 자라왔다. 매일 밤 듣는 오르골, 핸드폰 벨소리까지 그녀는 완벽한 백조를 위해서 자라온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열 두 살이 아니에요” 라고 외치는 니나에게서 그녀가 어느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미성숙한 그녀는 섹슈얼한 에너지가 가득한 흑조를 만나면서 무너진다. 


4. 성희롱, 성폭력적인 장면 : 영화는 왕자를 유혹해 백조에게서 빼앗아가는 흑조를 표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니나를 보여주면서 그녀가 겪는 성적인 스트레스들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던 역할에 대한 이해에 성폭력, 희롱이라는 탈을 쓰고 덮쳐오는 단장의 가르침 등은 그녀의 멘탈을 더 무너뜨린다. 찰나에 벌어지는 오묘한 불쾌감은 성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니나의 무의식을 흔들고 무너뜨리고 해방시킨다. 그래서 나는 자기 파괴적인 해방에 외부적인 폭력의 역할이 강했다고 생각해서 그로 인한 완성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니나와 반대되는 캐릭터인 릴리는 욕망의 존재를 이해하고 잘 다스려 매력으로 삼는 사람으로 나온다. 웨이터가 던지는 희롱적인 말을 맞받아치는 모습, 그리고 마약을 사용하고서도 모든 걸 기억하는 모습 등에서 그녀는 욕망의 선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그녀는 완벽을 위해 절제된 인형처럼 살아온 니나와는 다르게 자유롭고 그렇기에 유혹적이다. 


5. 무아라는 완성 : 배우의 완벽함에 있어서 ‘무아’는 최고의 칭찬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에서처럼 그 무아의 모습이 나의 이면이었다면 그야말로 완벽의 연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니나는 자신을 부수고 이면을 꺼내기 위해서 기존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 자체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태양을 맛보고 추락한 이카루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쌓아 놓은 백조의 자신 또한 너무 완벽했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에, 다른 모습의 완벽함을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의 틀을 깨고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을 적으로 놓고 죽여야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괴물의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