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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Nov 02. 2018

그땐 정말 (왜) 그랬을까

퀸카로 살아남는 법. 2004

-   '하이틴' # 1.  퀸카로 살아남는 법 . 2004






  ‘하이틴’이라는 주제를 맞이했을 때, 우리는 장장 세 시간쯤 앞으로의 일을 회의 하고 있었을 때였다. 맞다. 바로 ‘빨간 책방’에서의 일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겨우 끝까지 다다른 우리는 이제 영화 하나만 결정하면 되었다. 그런데 첫 주제의 첫 영화라니 이 얼마나 큰 부담인가. 그래서 주제를 낸 ‘미소’는 묘안을 내었다. “ ‘하이틴’이라고 검색해서 제일 먼저 뜨는 영화로 해요.” 그렇게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만났다. 나는 이 영화와 구면인 사이였다.      

  ‘하이틴’이라는 주제 안에서 영화를 고르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먼저 말해야겠다. 각자가 바라보는 ‘하이틴’의 색채가 달랐기 때문이다. ‘미소’는 ‘하이틴’ 영화를 주로 미국 학생들을 배경으로 한 발랄하고 가벼운 분위기를 가진 영화라고 말했다. ‘신중’은 자기는 주로 일본과 대만의 학생들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청소년이 주인공이면 되는 영화라며 <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파수꾼>을 예로 들었다. 도대체 인간의 10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보게 된 ‘하이틴 영화 추천’의 가장 선봉에 선 <퀸카로 살아남는 법>. 아프리카에서 살며 홈스쿨링을 하며 자란 ‘케이디’(린제이 로한)이 평범한 고등학교에 전학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그녀가 전학 온 일리노이즈 고등학교는 학생들 간에 뚜렷한 권역과 위계가 있는 곳이었으며 그 정상에는 여왕벌이라고 불리는 ‘레지나’(레이첼 맥아담스)가 있다. 그녀의 눈에 띈 케이디. 케이디는 레지나의 패거리에 ‘잠복’한다. 

  여기서 잠복이란 제니스와 함께 레지나 패거리들의 암투들을 샅샅이 알고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이 일부이다. 세상몰랐던 케이디는 학교에 발을 들인지 며칠 만에 이곳저곳에 이용당한다. 그녀만 모른다. 확확 넘겨지는 학창시절의 이슈들 중에 자기 본연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에서 발화된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영화는 원제 ‘Mean Girls'의 일일을 치열한 먹이사슬로 빗대어 희화화 한다. 보는 동안은 즐겁지만, 보고나서는 참 일관적으로 편협하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 내가 자라면서 본 여성인 친구들은 다들 웬만한 남자애들 보다 더 의리 넘쳤던 것 같은데.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연락해주는 중학교 친구들은 다 여자 친구들인데 말이지. 

  케이디가 맹수가 뛰어다니는 아프리카에서 자라서 그런 비유가 나왔다면, 나는 서울의 구석진 스머프 왕국 같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내부 생태계의 치열함 없이 잘 자랐다고 볼 수도 있겠다. 굳이 적이 있다면,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이념의 보수적인 선생님 몇 분 정도가 될 것 같다. 태평양 건너에서 나고 자란 나는 영화가 끝나고부터 영화와의 거리가 태평양만큼 멀어진다. 영화가 나온 '2000년대', '미국', '10대 여자애들'은 저랬단 말인가. 그때는 정말로 그랬을까?  

    

  정말로 그랬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굴뚝은 인기가 좋아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비슷한 하이틴 무비들을 만들어냈다. Mean Girl은 주인공이 되지는 못해도 항상 서브로 존재하며 미워할 수 없는 톡 쏘는 맛을 주었으며, 항상 프롬 킹과 프롬 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의 생태계가 있는 곳. 나는 10대에 이런 영화들을 즐겨봤었다. 아직도 가끔 보면 재미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정말 왜 이런 걸까?      

  내가 10대일 때, 미국 발 하이틴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교복을 입고 매일 같은 루틴을 도는 나에게는 사복을 입고 10대를 즐기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젊은 한 철’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목소리 크고 철없지만 해피엔딩의 10대들이었고, 나는 매일 넥타이를 매는 수능이라는 임종을 기다리는 애늙은이였다. ‘누가 나를 잡아다가 미국에다 던져두었으면’ 이라고 잠깐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랬다면, 총이나 마약에 의한 피해자가 되거나 총 든 마약상이 않았을까. 자유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10대에는 나와 같은 나이 대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면, 지금은 왜 이런 같은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걸까. 10대에 학습된 여전한 동경들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구획되어지면서 캐릭터를 보다 빨리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얼굴만 봐도 교내 생태계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 -_-^ ’의 이모티콘만 봐도 이 표정을 짓는 인물이 인터넷 소설의 어떤 역할인지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철없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10대’라는 시절. 그 시절이 너무 예뻐서 비슷한 이야기라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된다. 한국의 청소년 영화들은 어딘가 다들 심각하고 아프고, 슬프지만 미국의 하이틴들은 대부분 ‘로맨스’와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10대 시절의 무모한 젊음을 마음껏 보여준다. 그것도 어른인 감독들이 그려낸 만들어진 10대의 모습이겠지만, 그들이 정의하고 싶어 하는 하이틴은 서투르고 못나도 팽팽한 에너지, ‘가능성’으로 가득 차있다. 

  요즘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나의 10대는 ‘대학’ 하나로 인생 전체가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10대는 ‘가능성’ 보다는 ‘경쟁’ 혹은 ‘결단’ 이라는 키워드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2년간 한 번도 편하게 ‘나’에게 집중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단어라서 아직까지도 하이틴 영화들을 보면서 ‘너희들의 인생은 이제 시작인 걸, 다시 쓸 수 있어’ 라는 응원을 얻어간다. 비록 현실로 나왔을 때의 유통기한은 짧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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