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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Dec 20. 2018

소년과 소녀사이

하이틴#5. <천하장사 마돈나>, 2006

- 하이틴#5. <천하장사 마돈나>, 2006     


  나는, 성별과 젠더가 다른 사람이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성별은 남성이지만, 내가 정의한 나의 젠더는 ‘모호함’이다. 이 ‘모호함’이 나의 오랜 숙제였다. 

  젠더를 정의할 때, 쉽게 ‘사회에서의 역할’로서의 성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성별과 별 다를 것 없이 느꼈다. 결국에는 선택의 문제. ‘여성스러운’ ‘뚱뚱한’ ‘남자아이’로 자라는 동안 나는 남성과 여성이 충돌하고 있는 나를 인식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었다. 여성스러운 성격은 자라면서 고쳐지는 건지, 남자다운 것은 어쩜 이리도 나에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이걸 고쳐내지 못한다면 나는 성별을 전환해야 하는 것인지. 나의 몸에 대한 나의 의지는 ‘남들이 말하는’ 여성스러움에 굴복하고 마는 것인지. 나는 왜 나일 수 없는지.

  ‘하리수’와 ‘홍석천’으로 겨우 뭍으로 올라온 ‘젠더’와 ‘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많이 협소했다. 나는 둘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다. 나를 정의하는 데 지친 나는 그냥 나를 덮어놓기로 했다. 그렇게 10대를 살아냈을 쯤,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났다.      



  그때까지는 없던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소수자를 다룬 청소년 영화였다. 뚱뚱한 소년이 여자가 되기 위해 씨름을 한다는 코미디 영화. 이렇게 소수성으로 가득한 영화를 모두가 볼 수 있다니. 예나 지금이나, 금쪽같은 영화다. ‘여성스러운’ ‘뚱뚱한’ ‘남자아이’, ‘오동구’(류덕환)는 골인 지점만 다른 나의 모습이었다. 모든 영화는 어둠을 가르는 빛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영화는 나에게 빛 같았던 영화였다. ‘이런 모습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단 하나의 영화였으니까. 

  영화 속에서 동구는 많은 것들과 싸운다. 당장 성별을 바꾸기 위한 금전적 여유도 없고, 아빠는 실직한 술꾼이며 엄마는 도망 가버렸다. 씨름 자체도 몸을 부딪쳐 싸우는 일인데, 동구는 남자와 몸을 닿는 것마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니 일상이 곧 규모가 다른 싸움들이 산재해 있는 씨름판이다. 그녀가 되기 위한 그의 싸움을 보면서 나도 어느 순간 저 모래판에 서게 되겠구나. 그곳까지 가려면 ‘남자’ ‘여자’ ‘엄마’ ‘아빠’ ‘아들’ ‘딸’ 곁에 둔 말들과 하나하나 결판을 짓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쏟아내는 ‘~다움’과의 싸움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야 겨우 난 모래판에 서겠구나. 그렇게 서서 나는 뭘 할 수 있지. 뭘 해야 하지. 승패도 없이 질문만이 꼬리를 무는 긴 싸움이다.      



  엄마에게 동구는 말한다. “알아, 분명히 난 아주 못생긴 여자가 될 거야.”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까. 그래서 엄마는 동구가 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동구에게 손찌검을 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동구를 만난 엄마는 먼저, 그 일에 대해 사과한다. 그리고 “남들 보기에 예뻐 보이고 좋아 보이는 거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멋있게 사는 게 그런 게 진짜야.” 이 말을 시작으로 앞으로 이어질 동구의 길고 외로운 싸움을 존중하고 응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도 이런 말이 필요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존재를 긍정해주지 않았다. 대부분 동구의 아빠처럼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며 말했다. “가드 올려.” 그렇게 눈빛으로 말로 어쩔 때는 신체적으로 폭력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난 모난 사람이니까 정 맞겠거니’ 하며 어디에 속하지 못한 채로 10대를 살아냈다. 

  극 중 동구의 엄마는 유일하게 동구를 안아주는 어른이다. 그녀는 남들과 다른 동구를 모질게 다그쳤던 동구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구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 나 그거 되게 감사해. 알아, 앞으로 동구가 얼마나 힘들게 살게 될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싸우면서 살아야 되겠지, 근데 나 결정했어. 그 싸움 말리기보다 잘 싸울 수 있도록 응원해주기로. 당신한테 강요할 생각 없어. 아마 동구도 그럴 거야.” 이 대사는 ‘다름’을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이해와 포용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매일을 투쟁하듯 살아갈 그들에게 두 팔을 벌려주는 것. 안아주기 위해 온 마음을 활짝 펴 ‘다름’의 상처를 받아들여주는 자세. 그것이 사랑의 자세다.     



  하지만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동구를 가장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인물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동구의 절친, ‘동만’(박영서)이다. 매일 만날 때마다 장래희망이 바뀌어 있는 동만은 자신의 인생에는 까막눈이다. 하지만 동구를 바라보는 눈만은 진실 되다. 동구 앞에서 능청스럽게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 그에게 동구는 이미 성별의 꺼풀이 없는 ‘그냥 친구’다. 동구가 마돈나가 되어도, 천하장사가 되어도 동구는 그냥 동구다. 

  나도 살다보니 ‘동만’과 같은 친구가 생겼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그럴 수도?’ 라는 의심의 거리를 두고서 나를 관찰했다. 난 그들이 던진 ‘떠보는 말’의 지뢰들을 요리조리 피해왔다. 물론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서 대충 눈치를 챈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직접적인 말은 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렇기에 누구에게서도 장기간의 관계를 기약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에 돌아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난 혼자 있는 법을 배웠다. 나의 ‘다름’을 일찌감치 알아봐주고 내 입으로 그 말을 듣기까지 기다려준 친구 두 명이 있다. 나를 기다려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이해의 순간보다 감명 깊었던 건, 순간이 있기까지 그녀들이 나를 팔로 안고서 지켜봐주고 기다려줬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관계에도 많은 ‘동구’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지 못했던 순간들을 축적하며 살아온 당신이 동구일지도. 당신 곁에 동구가 있다면, 당신은 동구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만 사이에 어디쯤 서게 될 것이다. 어느 쪽에 서든 상관이 없다. 동구의 아빠도 결국 그랬듯, ‘자기 몫의 삶’을 인정해주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동구와 같다면, 동구처럼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보자. 혼자 모래밭에서 뒹구는 치열한 싸움일지라도 정말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응원해줄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 사람이 불어주는 바람을 타고서 한 걸음 내딛어보자. 나도 그래 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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