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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pr 22. 2017

프랭크

평범이 비범을 만났을 때.

 이렇다 할 재능은 없지만, 뮤지션을 꿈꾸는 평범한 회사원 존은 우연한 기회로 소론프르프브스 밴드에 키보드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무대에서도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탈을 벗지 않는 밴드의 보컬이자 정신적 지주인 프랭크와 밴드 일원들의 비범함에 매료되어 숲 속에서 진행되는 기한을 모르는 그들의 앨범 작업에까지 함께 참여한다. 

 그들의 기행들과 비범함 사이에서 존은 혼란을 겪지만, 그가 SNS에 올린 앨범 제작과정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음악축제에까지 초청을 받자 밴드를 설득해 축제에 참가하게 된다. 존은 뮤지션의 꿈에 다가갈수록 설레고 들뜨는 반면, 뭍으로 올라온 밴드 일원들은 불안해하며 존과 마찰이 일어난다.     



- 존과 프랭크 : 평범과 비범

 영화에서 존은 평범한 사람으로, 프랭크와 밴드의 일원은 비범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프랭크와 밴드의 비범함을 풀어보자면, 그들이 ‘예술성을 지녔다, 아니다’라는 평가보다는 단어의 뜻을 이루는 ‘非(아닐 비)‘의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하지 않다’라는 의미 로서의 비범 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들로 예술성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평범’이 지향하는 가치인 ‘대중성‘보다 그들만의 음악성을 지향하고 실험한다. 이 ’그들만의‘ 라는 부분이 이 밴드가 보통의 수준보다 뛰어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업을 평범한 존은 예술성으로 인식해 그들을 동경하고 닮기 위해 노력하지만, 천재와 괴짜를 오가는 그들에게 섞이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가 비범의 커뮤니티에서 겉도는 것을 보여준 행동이 앨범 작업의 SNS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외부에서 그들을 기록한 그의 행동은, 비범을 감지했지만 결코 비범이 될 수 없는 자가 취하는 동경과 관찰의 자세이다.

 손가락만 까딱이는 키보드 연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곡이 하고 싶은 존이지만 대중성에 목마른 그는 창작에 있어서 계속해서 부진을 겪는다. 그가 작곡하는 데 있어서 가진 고질적인 문제는 들었던 곡의 멜로디를 가져오는 것인데, 이는 음악성이 아닌 대중성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다. 그는 음악성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음악이 가져다주는 부수적 가치들이었다. 이런 존의 모습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그리고 창작의 본질이 아닌 음악의 표면만 바라보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인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적, 대중의 틀 밖에 있었던 밴드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성 외에 대중성이라는 가치가 주입되게 된 계기는 존의 SNS 활동 때문이다. 이때부터 존이 추구하는 음악과 밴드가 추구하는 음악, 그리고 그 둘의 차이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존의 평범과 밴드 멤버들의 비범이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밴드는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에, 존이 바랐던 대중성이 분별없이, 그리고 존이라는 틀을 통해서 ‘구리게’들어오니 거부반응을 보인다. 결국 밴드도, 지주였던 프랭크도 대중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술 사이에서 부딪치다 와해된다. 

 존이 생각하는 음악의 완성은 대중에 있다. 팔로워와 조회수 그리고 타인이 불러주는 음악축제 등 외부적인 것에 자신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조회수에 가려졌던 수많은 의견들을 직접 들으며 일희일비한다. 반면, 프랭크와 밴드 일원들은 대중들에게는 정신병자, 괴짜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하고 음악에 있어서 자신들의 가치를 투영하고 철저하게 외부적인 것을 격리시키는 외골수이다. 그들은 여러모로 평범과는 다른 축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밴드가 선보이는 음악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전위적인 예술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관객 개인이 각자 평가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추구한 가치는 내부에 있었다는 점이다. 정신병자, 괴짜라고 뜯기고 할퀴어져도 그들은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다시 만나 그들의 작업을 한다. 하지만 존은 자신이 씌웠던 그들의 허울이 벗겨지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를 수호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진정한 비범을 느끼자, 어쩌면 그 모습에서 초라하고 겉 멋든 자신의 꿈을 직시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떠난다.       



- 꿈을 바라보는 진실된 자세 

 영화가 제시하는 비범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점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존이었다. 그는 꾸준히 평범했고,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자신의 꿈을 곡해했다. 어쩌면 그 순간까지도 꿈을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존의 본질은 음악성이 아니라 음악으로 인한 유명세였다. 그가 팔로워와 조회수를 보고 환호하고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열망하는 반면, 창작의 본질인 ‘자신으로 온전하기’,’솔직한 자신을 알고 반영하기‘에는 몰입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본질에 따라오는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인 유명세에 집중하다 보니 그는 조바심을 낸다. 그는 밴드와 함께했을 때, 돈이 떨어져감에 따라서, 타인의 평가에 따라서 계속 불안해한다. 

 이 영화는 나에게 ‘나는 나의 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내가 바라는 꿈의 표면을 바라는 것인가 아니면 본질을 바라는 것인가.’. 그리고 ‘꿈 안에서 나는 얼마나 나에게 솔직한가.’를 묻는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온 나는 존처럼 극한의 상황이 될 때까지 정확한 답을 모를 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하지만 계속 이 질문을 닦고 정제해 가야 진실된 나에게 닿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진실된, 본질의 가치를 알았을 때, 괴짜같은 외골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복기해야할 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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