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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an 24. 2019

미래가 될 오늘에게

<백 투 더 퓨처> 보고 '족구'하는 소리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대한 나의 감상은 마티와 연신 그가 'Doc!'이라고 부르는 에메트 박사가 ‘과거에서 미래로 돌아와’ 이번에는 하늘을 가로질러 ‘미래로’ 섬광이 되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자동차의 속력을 올려 빛이 되어 미래로 사라지는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맞다. <족구왕>.

  <백 투더 퓨처>를 보고 20대를 걷어내고 앞자리를 3으로 갈아치운 이 시점에 <족구왕>을 떠올리는 것은 <백 투 더 퓨처>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 1955년 시계탑에 벼락이 내리치던 하루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줄 세워 이리저리 엮어낸 것처럼 운명적인 일일까. 아니면 그저 낭만을 찾는 나의 관성에서 나온 일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게 시간에 기록된 운명적 사건일지도. 

  <족구왕>의 만섭은 미래에서 왔다. 천사는 그에게 너무나 지루한 인생을 보냈다며 천국에서도 ‘즐길 줄 모를 것’이라며 만섭을 24살로 보내 버린다. 그 덕에 군대를 한 번 더 갔다 와야 했지만, 그에게는 ‘젊음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다. 미래를 알기 때문에 각박한 20대의 마음에 ‘사랑’과 ‘족구’가 끼어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온 힘으로 ‘현재’를 살다 간다. 

  <백 투 더 퓨처>에서나 <족구왕>에서나 미래를 모른 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미래의 그림자 안에 있다. 차를 박살 낸 상사에게 한 마디 못하고 ‘골치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백 투 더 퓨처>의 마티의 아빠도, 모든 대화가 “그럼, 공무원 준비 해.”로 끝나는 <족구왕>의 형국선배도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 앞에서 주눅 들어있는 사람들이다. 반면, 미래에서 온 마티와 만섭은 미래 앞에서 용감무쌍하다. 마티는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만섭은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라고 이야기 한다. 현재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며 미래에 살고, 미래에서 온 사람들은 현재를 산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겁’이라는 게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무용한지를 깨닫는다. 나는 죽을까봐 어쩌면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을 살까봐 겁을 집어먹으며 산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미래를 알고 있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된다면, 겁은 꽤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움츠러든 어깨는 내려놓고 긴 숨을 쉬게 된다. 이렇게 정말 어쩌다 한 번, 내가 ‘지금, 여기’를 사는 순간이 있다. 영화 속 미래에서 온 사람들은 이 순간들을 좀 더 많이 만들라고 말하기 위해 계속 현재의 문을 두드리는지도 모른다. 

  <백 투 더 퓨처>에서의 ‘오늘’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벼락이 치는 그 한 순간마다 매번 미래가 뒤바뀐다. 그렇다고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비극을 주시하는 것은 아니다. 바뀐 오늘들이 쌓여 ‘바꾸어 진’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백 투 더 퓨처>시리즈의 캐릭터들은 지루하다 싶을 만큼 일관적이다. 하지만 그 일관성이 미래를 바꾼 열쇠이다. 마티가 찌질했던 과거의 아빠에게 전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30년을 지나 말쑥하고 당당한 모습의 마티의 아빠의 입에서 다시 마티에게 전해질 때, 같은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축적된 시간의 힘을 느낀다. 

  나는 오늘을 미래의 어디로 밀고 있는 것일까. 그 미는 힘에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를 보고 <족구왕>을 떠올린 미련한 낭만적 관성이 섞여있겠지. 미래가 될 오늘에게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부탁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과거를 낳으며 미래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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