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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Dec 30. 2018

물랑루즈

come what may


  사랑에 도취되어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집합지, 파리로 찾아온 작가 지망생 ‘크리스챤’(이완 맥그리거)과 물랑루즈에서 사랑을 파는 창부였지만 크리스챤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뜬 ‘섀틴’(니콜 키드먼)은 함께 노래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만 사랑하리. 내가 죽는 그날까지.” 이 한 마디에 영화의 모든 내용이 들어가 있다. 그들은 ‘어떤 일’들을 무릅쓰고 죽는 그날까지 사랑을 했다. 사랑을 흔든 ‘어떤 일’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 <물랑루즈>의 전략은 확실하다.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 심지어 음악까지 알기 쉬운 걸 골라 배열한다. 그리고 그것을 완벽한 하나의 쇼로 화려하게 치장한다. 영화의 이야기 속으로 더 빠르게 몰입할 수 있게, 그리고 영화에서 나올 때는 영화의 황홀경으로 인해 깊은 심적, 시각적 잔상이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주인공들의 사랑을 쥐고 흔든 감정은 고리타분하게도 ‘질투’다.

  질투는 철저히 육체적이다. ‘소유’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물랑루즈가 극장이 되고 자신이 배우가 되려면 섀틴은 백작과 혼인을 해야만 한다. 백작은 그녀를 갖기 위해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운명이 있음에도 섀틴과 크리스챤은 백작을 사이에 두고 몰래 사랑을 나눈다. 크리스챤은 섀틴이 백작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랑을 증명하는 노래라며 섀틴과 ‘어떤 일이 있어도 죽는 날까지 사랑하리라’는 노래를 지어주지만, 섀틴이 백작과 첫날밤을 가지던 날 그는 질투에 휩싸인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안 섀틴이 크리스챤에게 이별을 고하자 결국 그는 질투에 눈이 멀어 공연을 하고 있는 섀틴에게 찾아가 “나도 돈을 지불할게”라는 말을 내뱉는다. 섀틴이 창부라는 설정은 사랑의 요소 중에서 ‘육체성’과 ‘소유’라는 촉을 뾰족하게 세운다. 그들의 사랑은 공유도, 분리도, 다중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의 소유, 하나의 사랑만이 유효하다.

  사랑과 질투는 육체의 일이라는 점은 영화 <그녀>에서도 주된 화두이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육체를 넘어선 사랑을 하는 그는 사만다와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 외에 600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테오도르는 절망한다. 사만다와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었던 그도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사만다는 육체가 없는 존재였지만, 그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에 ‘질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시간과 공간 안에 다중의 내가 존재하지 못하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사랑하는 동안에 질투라는 감정은 거쳐야 될 관문 혹은 평생을 안고 가야할 사랑의 울퉁불퉁한 이면 같다.

  <물랑루즈>와 <그녀>에서 모두 그녀들은 떠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섀틴은 죽었고, 사만다는 떠났다는 점. 그래서 크리스챤은 사랑을 추억하는 시간을 테오도르는 사랑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 글을 쓴다. 테오도르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크리스챤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남을 글을 쓴다. 질투를 동반한 사랑의 경험이 테오도르에게는 개인적인 성장의 시간을 주었다면, 크리스챤에게는 운명적인 영감의 순간이 되었다. 영화 <물랑루즈>가 끝까지 고수하고 온 영화를 다 바쳐 헌신하고 있는 ‘쇼’를 위한 자세. 죽음을 무릅쓴 사랑을 뒤튼 질투까지 고스란히 쇼에 바친다. 육체가 그렇듯 쇼도 무한한 시간 안에서 찰나의 순간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질투라는 감정과 쇼라는 형식을 빌려서 육체를 가진 모두에게 놓인 찬란하고 유한한 순간을 유희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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