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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r 24. 2019

문라이트

파랑

  영화 <문라이트>는 장을 나눠 진행되는 시(詩)다. ‘리틀-샤이론-블랙’으로 시를 이어가면서 운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운구들은 주인공의 이름이 달라질 때마다 조금씩 변형되지만 같은 구조를 반복하며 주인공의 삶을 움직인다.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파란색들이 그렇고, 인물들 또한 그렇다. 2장과 3장으로 갈수록 점점 더 의미를 드러내는 케빈과 엄마 그리고 모습은 점점 뒤로 사라지지만 사랑의 영향력은 잃지 않는 후안과 테레사도 파도처럼 반복되는 영화의 흐름 안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후안이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장면은 영화 <문라이트>를 함축하며 리틀과 샤이론, 블랙의 삶을 구축하는 주된 문장으로 기능한다. 가슴께 오는 물을 걸어 후안에게 걸어가는 리틀. 후안에게 안겨 처음으로 세상의 세례를 받는 듯 혹은 양수에서 꺼내지는 듯이 ‘세상의 중심’에 눕는 리틀. 그리고 후안에게서 수영을 배우는 리틀과 그에게서 떠나 더 깊은 물 더 높은 파도로 떠나기는 리틀의 모습. 짧은 장면이지만, 그 안에는 리틀이 샤이론을 지나 블랙까지 걸어가는 길이 담겨있다. 

  리틀은 계속 깊어지는 바다로 향한다. 그가 처음 서있는 위치는 파도가 가슴께 와서 손으로 느끼고 두 다리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깊이다. 리틀이 블랙으로 자라나가는 그 시작점에서 리틀은 아직까진 버티고 설 두 다리가 있다. 하나는 엄마고, 하나는 후안이다. 두 사람은 마약촌을 곁에 두고 빈곤하게 살아가는 흑인 소년 리틀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선택지이다. 가난에 야금야금 뜯어 먹히다 마약을 하며 무너져 내리거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신변으로 그들에게 마약을 팔며 살아가는 것. 리틀은 이 두 ‘어른’ 사이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앞에 놓인 그 바다를 처음 만났다. 파도는 시야를 어지럽히며 찰랑거리지만, 리틀이 두 다리로 서 있는 한,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리틀은 두 다리로 후안을 따라 바다로 들어간다. 자신의 목까지 오는 파도 속에서 리틀은 후안의 팔에 안겨 하늘을 향해 눕는다. 장면 중에서 걷거나 수영하지 않고 유일하게 ‘부유’하는 상태이다. 후안에게 몸을 맡긴 리틀은 파도에 맞서지도 않고, 바다와 수평이 된 채로 하늘을 본다. 그렇게 후안에 의해서 태어나듯이, 혹은 후안에 의해서 바다에서 건져지듯이 리틀은 세상의 중심에 눕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후안은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후안의 모습을 서툴게 따라하는 리틀의 모습은 이어지는 장 ‘샤이론’에서의 불안한 샤이론의 모습과 겹쳐진다. 샤이론은 두 삶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는 그에게 오는 시련에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있다. 후안이 죽고, 엄마가 마약에 빨려들고 나버린 샤이론의 걸음은 불편하게 흔들거린다. 이번에는 그런 그를 다른 사람이 붙잡는다. 바닷가에서 다른 모습의 사랑으로 ‘케빈’이. 

  서툴게 팔을 파닥거리던 리틀은 금방 후안의 모습을 따라한다. 그는 이제, 혼자 바다로 향할 준비가 되었다. 이제 두 다리는 뜨고, 물에 맞서서 숨을 쉬며 팔을 휘저어야 할 때다. 이제 하늘의 자리마저 가득 채운 바다는 작은 리틀의 몸이 헤치고 나가기에 버겁고 힘들어 보인다. 그는 계속 깊은 곳으로 팔을 벌려 더듬더듬 헤엄쳐 나가다가 끝내 파도가 리틀과 화면을 잡아먹고서야 화면은 물 밖에서 뛰노는 리틀로 넘어간다. 

  블랙은 샤이론과도 리틀과도 다른 모습이다. 다부진 몸과 그가 차에 틀어놓는 힙합음악, 그리고 과시하듯 차고 있는 장신구들. 2장에서 겪은 사건들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한, 그 사건으로 ‘거의 새롭게’ 탄생한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버겁다. 어린 리틀이 깊은 바다로 첨벙거리며 휩쓸릴 듯 나아간 것처럼, 블랙의 다리는 땅에 닿아있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계속해서 휘젓고 있는 상태가 블랙의 현재다. 그의 몸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의 귓전에는 계속해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블랙은 정지된 사람이다. 몸은 마약을 팔고 있는 아틀란타에 묶여있고, 마음은 후안이 수영을 가르쳐주었던, 케빈에게 사랑을 느꼈던 그 바닷가에 묶어놓았다. 그런 그의 몸을 움직인 것은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케빈의 목소리. 블랙은 다시 사랑의 기억으로 봉인해두었던 그 바닷가로 향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후안’이라는 이름을 만난다. 하지만 리틀에게 그는 미스터 ‘노바디’이다. 후안이 ‘달빛 아래서 흑인 아이들은 파랗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리틀에게 해줬을 때, 리틀은 “그럼 아저씨의 이름은 ‘블루’ 인가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후안은 아니라고 답하며 “때가 되면 스스로 뭐가 될지 정해야 해”라고 말한다. 리틀은 나중에 그가 ‘노바디’도 ‘블루’도 아닌 ‘후안’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틀도 세 가지 이름 사이에서 ‘블랙’을 고르는 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블랙이 스스로 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사랑’이다. 영화 <문라이트>는 수많은 파랑 속에서 사랑을 골라 간직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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