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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Apr 29. 2019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거요.’    

  

  마마지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야깃거리를 찾던 작가는 마마지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들으러 ‘파이’(이르판 칸)를 찾아간다. 그렇게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표류하는 파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바다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우리는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홀린 왕처럼,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아가는 아이들처럼 넋을 놓고 이야기의 키를 잡은 파이의 항해를 따라나선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은 중화시키고, 어떤 것은 승화시킨다. 중화되거나 승화되는 것들은 보통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다. 파이의 원래 이름은 ‘피신’이었다. 영어로 ‘오줌’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발음 때문에 그는 자신을 ‘파이’라고 지칭한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이름에 걸맞은 사건을 만들어 내면서. 이야기가 중화시키는 ‘감당하기 힘든’것들에는 이처럼 손에 닿지 않는 작고 간지러운 부스럼 같은 사건도 있는 반면, 가족이 탄 배가 침몰하고 혼자 바다에 표류하게 되는 끔찍한 사건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각자가 가진 그릇에서 넘치는 것들을 이야기로 만든다. 인간이 정면으로 마주하기 힘든 것들이 이야기로 변신할 때, 우리는 이야기가 흔드는 꼬리를 따라 흔들린다. 이렇게 이야기는 당신을 유혹한다. 

  파이의 이야기는 ‘신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라는 마마지의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고 이미 완결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파이도, 리처드 파커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야기에 있어서 ‘믿음’은 소중한 원동력이다. 이야기가 아무리 매력이 넘쳐도 그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다음 이야기를 향한 호기심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기심에서 시작해 이야기 끝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들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와 믿음은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이야기 속 파이는 ‘믿음’을 찾는다. 그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거치면서 신의 존재를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호랑이와 함께 바다에 표류한 파이에게 신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는 별을 뿌린 것처럼 찬란하다가도 고래의 몸짓 한 번에 파이가 리처드 파커가 있는 배 안에서 겨우 건져온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앗아간다. 이렇게 바다는 매일 면을 달리하면서 파이의 믿음을 고갈시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긴장이다. 정제되지 않은 관계에서 두 존재의 만남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아무리 서로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두 존재가 이별하기 전까지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두 존재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살아서 존재하기’ 위해 남은 가장 날카로운 본능이다. 두 존재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떨어져 있는 것은 ‘삶’을 바라보며 죽음을 경계하는 자세와도 같다. 신은 두 존재를 바다에 묶어 이리저리 굴리면서 단 하나의 믿음만을 남긴다. 살고자하는 본능에 대한 믿음. 

  살고자 하는 본능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응집되어있다. 여정이 지나면서 파이가 자신으로부터 분리했던 본능을 먹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리고 편안한 죽음의 공간에서 자기 발로 바다로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그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던 때와는 다르게, 빠르게 땅을 향해 나간다. 멈추지 않고 삶의 여정을 나선 사람에게 신은 정해진 길을 내어준다. 리처드 파커와 함께한 이야기 속에서 남은 믿음은 ‘생(生)을 향한 믿음’ 하나다. 그렇지만 파이는 우리에게 살아남기 위해 처참하게 서로를 살육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서는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인지 묻는다. 당신의 믿음을 먹고 자라난 이야기가 당신에게 말을 건다. “나를 통해서 믿고 싶은 것을 믿으세요.” 

  세 가지 종교를 동시에 믿는 파이를 보며 아빠는 “동시에 여러 개를 믿는 것은 안 믿는 것과 같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파이는 그 세 가지 종교가 같은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 파이의 말처럼 두 가지 이야기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의 형태는 달라도 두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같으니까. 우리는 생(生)의 처참함도, 그것의 환상적인 면과 끈질기고 숭고한 의지도 함께 믿을 수 있다. 그것이 모두 다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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