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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08. 2019

국도극장

담배 한 개비의 시간

  ‘기태’(이동휘)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10년 가까이 해오던 고시생 생활을 접고 고향에 막 발을 디딘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정처 없이 시내를 걷는다. 그렇게 돌아온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든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처럼 말하지만,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변변찮은 신분으로 고향에 있자니 불편하지만 서울에 올라가서 뭔가를 할 밑천도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은 학교를 다닐 때 받았던 장학금 대출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도저도 하지 못한 채로 고향에 머문다. 그런 기태에게 엄마는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관람객이 찾아오곤 하는, 허름한 동네 극장인 ‘국도극장’에 일자리를 알아봐준다. 기태는 곧 떠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곳에서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돕는다. 

  ‘돕는다’라고 썼지만, 그가 일을 하는 모습은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극장에 걸리는 간판 그림을 그리는 ‘오씨 아저씨’(이한위)와 극장 앞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더 많다. 대단한 인생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한담을 나누는 두 사람. 그들은 국도극장 앞에서 자주 담배 한 개비가 타들어가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고향으로 내려온 기태는 모든 것이 소진 된 상태이다.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고시에 대한 희망을 걸 수도 없다. 소진되다 못해 자신이 빈 듯한 공허한 상태. 그는 그에게 돈 좀 번다며 거드름 피우는 친구의 차에 눌 오줌조차도 부족하다. 차에 그의 오줌발이 닿지 못한 것은 그가 오줌마저도 소진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찰나에도 머뭇거리며 시간을 놓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초등학교 동창 ‘영은’(이상희)이 나타난다. 지친 마음으로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서울에서 이룰 꿈을 향해 부단히 노력한다. 두 사람은 국도극장을 통해서 가까워진다. 국도극장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 기태가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자신이 깎여나갈 정도로 정신없는 속도로 지나갔다면 멈춰있다시피 하는 국도극장의 시간은 기태에게 서서히 숨통을 열어준다. 기태에게는 떠나가는 형과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가 있고, 보고 싶지만 먼 곳에 있는 영은이 있다. 이제 국도극장의 시간을 사는 기태 곁을 모두가 떠나갔지만 그는 전처럼 불안하지 않다. 이제는 그가 풍경이 되어 멈춰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시간, 국도극장 앞에서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보내면서.      



- 제 20회 전주 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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