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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09. 2019

뎀프시롤 (가제)

장단치며 주먹지르기

  바닷가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치는 장구가 맑고 힘차게 울린다. 그리고 그녀의 장구소리에 맞춰 무술인지 무용인지 모를 애매한 동작을 열심히 휘두르는 남자가 있다. 영화 <뎀프시롤(가제)>는 뜬금없지만 진지한, 영문을 모르겠는 두 조합으로 시작한다. ‘판소리’와 ‘복싱’. 

  ‘병구’(엄태구)는 복싱이 다시 하고 싶다. 하지만 복귀하기에는 나이도 많고 펀치 드렁크 증상 때문에 기억도 가물가물 사라져간다. 매사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멍하고 느릿한 병구지만 복싱에 대한 열정, 그 중에서도 자신만의 ‘판소리 복싱’을 위한 열정은 식지 않는다. 떠듬떠듬 말하는 그는 말끝마다 ‘판소리 복싱을 세계에 선보이겠다.’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단어가 오직 그것 하나뿐인 것처럼. 

그런 병구 앞에 체육관 신입회원 ‘민지’(혜리)가 나타난다. 그의 꿈을 알게 된 민지의 응원에 힘입어 병구는 링 위에서 선보일 ‘판소리 복싱’에 열중하게 된다. 그를 말리던 관장도 그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복귀전에 힘을 보태면서 삼류 복서의 ‘판소리 복싱’이 시작된다. 

  영화는 판소리와 복싱이라는 이질적인 두 장르를 접붙이는 동시에 극 중에 ‘판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한다. 영화 속 판소리는 장면 해석하고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하며 독특한 향토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판소리 복싱을 이끄는 사람은 병구의 옛 친구 ‘지연’과 현재의 ‘민지’이다. 두 사람은 각자 과거와 현재에서 장구채를 쥐고 장단을 이끌어나간다. 병구의 판소리 복싱은 혼자서 불쑥 튀어나오는 스텝과 펀치가 아니다. 그를 달구고 이끄는 신명나는 장단이 필요하다. 판소리 복싱은 둘 이상의 사람들의 합이 맞아야 이룰 수 있는 꿈이다. 모자란 병구와 그를 지탱해주는 정감 가는 인물들의 판소리 복싱을 선보일 링 위로 가기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위한 여정은 이야기의 끝에서 뭉클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극중에서 병구는 망가진 오래된 TV를 고치는 대신 하나 새로 사라는 수리기사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고쳐주세요” 병구를 둘러싼 세계는 시대가 바뀌어 ‘고장 난 것’이 되어버렸다. 그가 매달리는 판소리와 복싱에서부터, 재개발 권유를 받는 관장의 체육관, 졸업할 때까지 뭘 할지 정하지 못해서 그냥 공무원 준비를 해볼까 하는 민지까지. 시대가 빠르게 달려가 버려서 ‘고장 나고 뒤쳐진’ 것이 되어버린 존재들. 병구의 꿈인 ‘판소리 복싱’의 신명나는 스텝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잊혀져가는 것들의 박동이다. 시대가 버려도 그들의 가슴은 뛰고 있다. 병구가 꾼 ‘길고 이상한 꿈’이란 잊혀져가는 존재들이 장단이 스텝을 이끌고 펀치가 장단에 힘입어 날아가듯 함께 세계에 존재함을 강렬하게 인식하고 발산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 제 20회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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