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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27. 2019

폭력의 기록

<액트 오브 킬링>(2013) , <김 군>(2018)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학살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1000만 명 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학살한 인도네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의 가장 말단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여나간 ‘프레만’(Freeman) 중 하나인 ‘안와르 콩고’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낸다. 감독은 안와르 콩고가 자신의 행적을 영화로 기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안와르 콩고는 그동안의 자신의 업적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웃는 얼굴로 목을 조르고, 사람의 목을 밟으며 노래를 부르고, 중간 중간 춤도 추면서. 

  안와르 콩고의 현재의 행적은 많은 생각의 꼬리를 만들어 낸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한 인간의 악마적 행동에 대한 것이다. 그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끔찍한 방법들과, 그것을 죄책감 없이 웃으며 업적으로 삼으려는 그의 행동에서 인간은 악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학살자의 과거와는 유리된 그의 평화로운 현재에서 우리가 느끼는 소름, 매스꺼움 등 육체적으로도 느껴지는 불편함은 안와르 콩고 한 사람의 뻔뻔하도록 행복한 삶에서만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악’을 마주 했을 때의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피해자들의 피와 비명 없이도 관객에게 악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업적 중 하나다.  

  안와르 콩고는 노래하고 춤을 추며 영화를 즐긴다. 그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을 단죄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심어진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우리는 예술에게서 무력감을 느낀다. 영화는 그의 학살 방법의 영감을 주기도 했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의 다양한 학살방법을 자신이 향유했던 그 시대의 영화들에게서 차용했다고 말한다. 그 학살의 행적을 다시 영화로 담아내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영화가 일조했던 폭력을 다시 영화가 기록함으로써 자백하는 일이다. 


  최근 5.18을 기록한 영화 <김 군>이 개봉하였다.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영화는 사진에 찍힌 인물들을 찾아가며 사진에 39년의 시간을 부여한다. 영화의 시작은 군사 평론가 지만원이 5.18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의 인물들을 북한군으로 지목하면서 시작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총 600명의 북한군이 내려와 벌인 일이라는 것. 그는 광주 시민들의 얼굴에 빨간 점과 빨간 선을 이어 북한 고위직 간부와 연결시킨다. 그렇게 시민들은 ‘제 1 광수’와 같이 숫자가 붙은 ‘광수’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액트 오브 킬링>이 승자들의 역사 속에서 학살자의 모습을 담아냈다면, <김 군>은 피해자들의 39년, 그리고 현재의 시간을 기록한다. <액트 오브 킬링>이 5년이 걸린 작업이었다면 <김 군>은 4년이라는 시간을 쏟은 작업이다. 두 영화는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을 서로 다른 시선에서 출발해 담고 있지만, 여러 지점에서 만난다. 


  두 영화의 폭력의 기록에서 공통된 가해자들의 자세는 ‘정당화’이다. <액트 오브 킬링>의 한 가해자는 이 모든 폭력의 역사를 따라가면 ‘아담과 이브’가 있고, ‘카인과 아벨’이 있다고 말한다. 또 그들은 ‘자유’를 수호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행동으로 공산주의를 몰아낸 것이라며 말한다. 그렇게 영화로까지 남겨 대대손손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 영화를 만들어 냈다. <김 군>에서도 북한군이라고 지목한 600명의 시민들이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을 증명하며 1980년 5월의 기억해내지만, 한 편에서는 현충원에서 북한군을 무찌른 계엄군들의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한 편으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하고, 한 편으로는 너무나 공고한 이들의 믿음이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는 모습을 보며, 앗아간 생명들보다 위대한 이념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영화 <김 군>에서 ‘광수’로 지목되었던 시민들은 여전히 1980년 5월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 날 이후로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탄환처럼 그들의 상처는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소리 내어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곡된 시선들로 인해 받을 불합리한 처사들을 두려워하며 침묵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더 참혹하다. 그들의 역사는 학살로서 승리한 자들이 쥐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학살의 주요 세력이었던 사설 무장군인 ‘판차실라’가 중국인들의 거주지에서 돈을 빼앗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웃으며 ‘재연’하지만, 돈을 빼앗기는 중국인들의 표정은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 여전히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의 신변이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상처를 가진 자들은 침묵하고, 상처를 낸 자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두 사건이 현존하는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만난다. 

  <액트 오브 킬링>의 끝,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주로 학살을 했던 건물 옥상에 다시 선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웃으며 목을 조르는 시범을 보였던 그. 하지만 5년의 시간동안 자신의 죄를 직접 다시 행하고, 영화라는 형태로 마주한 그는 그 자리에서 웃음 짓지 못한다. 결국 구역질을 하며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무언가를 토해내려고 하지만, 나오는 것은 없다. 너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죽음의 죄에 부여된 뒤늦은 죄책감에는 구원은 없다. 이는 어떤 역사에도 통용될 것이다. 우리는 한정된 삶을 살지만 역사에 기록된 죄는 씻기지 않으니까. 정해진 삶 동안의 속죄가 없다면, 빌고 싶어도 자신의 죄를 빌 곳이 없어진다. 영화 <김 군>은 39년의 세월을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광주 도청의 문을 열며 막을 내린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상처를 들여다봐달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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