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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11. 2017

케빈에 대하여

내 안에서 나온 남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성역과도 같았던 모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그것도 사이코패스 아들이라는 가장 극점에 있는 악을 두어 그를 있게 한 ‘엄마’라는 존재를 조명한다. 영화 속 엄마, 에바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아들 케빈으로 인해서 잠식당한다. 그녀는 엄마의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들 케빈은 그녀를 꿰뚫어보고 역할이 아닌 사랑을 갈구한다. 케빈이 엄마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는 엄마에게 대체 불가능한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태초적인 상태에 대한 갈망이 있다.   

 



- 상처에 대하여

 케빈은 면회를 온 에바에게 그녀의 본성이 드러난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고양이의 배변 훈련법에 대해 말한다. 고양이는 자신의 변의 냄새를 맡고, 그 역함에 화장실을 쓴다는 것이 케빈의 말이다. 그리고 케빈의 반항을 참지 못해 에바가 그의 팔을 부러뜨렸던 사건이 이어진다. 케빈은 그 사건으로 인해 서로가 보았던 ‘엄마’의 본성을 이용해 에바를 길들인다. 고통의 감정을 통한 교정, 이것이 케빈이 교묘하게 취했던, 사랑받는 방식이다. 

 케빈은 엄마에게 일반적 사랑을 넘어선 강한 유착관계를 원했다. 에바가 취할 수 있는 역할로서의 엄마가 아닌 감정적이고 내면적인 강렬한 유착을 바란 것이다. 에바가 역할조차 겨우 해내고 있었던 그때 매우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였던 케빈이 선택한 방법은 ‘사랑받지 못한다면 길들인다.‘ 이었다. 

 상처는 강한 감정을 수반한다. 그리고 그것이 흉터나 상실로 남았을 때는 그때의 감정 또한 함께 남는다. 자신을 잃어 공허하고 흔들리고 있는 에바에게 케빈은 상처 입히고 상실을 주며, 그 자리를 온통 자신으로 채워 넣는다. 

 에바가 자신으로 돌아가려했을 때, 엄마의 소임을 다하려 했을 때, 케빈으로부터 가해진 강한 충격이 하나 둘씩 쌓이면 어느 순간 에바의 주변에는 온통 케빈만이 남게 된다. 상처를 통한 지속적인 감정의 주입 그리고 케빈의 생애에 걸친 긴 훈련은, 에바의 삶에 상처만을 남겼고, 결국 그녀를 그의 곁에 묶어두었다. 케빈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지며 살아가는 에바는 그의 곁에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살인자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황폐한 시간 속에서 이 모든 일을 되짚는다.      




- 내 안에서 나온 남 

  에바에게 케빈은 자신을 닮은 아들이다. 외형적으로나, 그리고 내면적으로나 케빈은 에바를 똑 닮았다. 손톱을 물어뜯어 줄 세워 늘어놓는 케빈의 모습과 깨진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 에그를 먹으며 나온 껍질들을 나란히 줄짓는 모습에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에바가 살 찐 사람들에게 한 막말에 대해 케빈이 지적하자 에바는 ‘너도 그렇다’며 받아친다. 그 말에 케빈이 ‘누굴 닮았겠어.’라고 되받아치는 장면에서도 둘이 닮았다는 점을 대사를 통해서도 직접 알 수 있다. 

 하지만 에바에게 케빈은 자신에게서 나온 철저한 남이다. 그녀에게 아들은 성장하는 내내 자신과 대립했던 나와 가장 내밀하게 닿은 악랄한 남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살인자 아들에 대해 ‘왜 그랬냐’고 물은 질문에 ‘알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르겠다.’라는 이해의 영역 밖의 대답을 들었을 때에 안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아들이다. 

 이렇듯 에바에게 케빈은 자신의 조각을 가진 남이다. 사실 모든 부모-자식의 관계가 이렇다. 자신의 일부였다가 철저히 남이 되는 관계. 이 관계를 부모가 혹은 자식이 역행하는 순간, 비극이 찾아온다. 개인적으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는 에바가 사이코패스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통해서 완전해지고 싶어 하는 아들의 욕망이 그와 그의 엄마를 둘 밖에 없는 공허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에바가 지고 사는 죄책감, 그곳에 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자식의 죄를 지고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의 이유를 아들의 일부가 된 자신의 모습에 둔 것이 그녀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다른 형식의 모성인 것 같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왜’라고 묻는 것도 아들을 키운 자로서의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다. 그녀의 질문에는 영화 속에서 펼쳐진 케빈의 성장과정에서 느꼈던 고난과 의문들이 있었지만, 케빈은 ‘이제는 모르겠다.’는 말로 그녀의 죄책감마저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는 선천적 악과 모성으로의 영향을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들을 모호하게 제시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절대 악 앞에서 좌절한 한 가장 내밀했던 한 개인으로 영화가 끝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미약하게 이어져있던, 부모-자식의 끈이 끊어져 버리고 에바가 엄마가 아닌 개인으로서 일련의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생각한다.      

   



- 차가운 빨강

 영화는 빨강색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첫 장면에서 토마토축제의 자유로움을 상징했던 빨강은 살인사건과 그에 연관된 두렵고 무서운, 한편으로는 역겨운 감정으로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현재의 시간에 에바는 집에 칠해진 빨강 페인트를 지운다. 지치고 가냘픈 그녀가 온힘을 다해 지우는 것은 그녀의 죄책감, 엄마로서의 삶, 사건으로 인한 상처일 것이다. 

 영화 속의 이 모든 빨강은 차갑기 그지없다. 가장 강렬한 색깔인 동시에 뜨겁고 동적인 에너지를 가진 색깔이 ‘빨강’이다. 빨강의 이미지가 가진 강렬함만 남기고 거기에 차갑고 서늘한 감정을 더해 전하는 화법이 인상 깊다. 

 이밖에도 영화 속의 진지한, 불안정한 상황과는 정반대인 일상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가벼운 포크송들이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며, 상황이 가진 불안정함을 더 증폭시킨다. 흔들리는 단편적인 화면들은 에바의 찬란했던 과거나 가장 끔직한 기억인 아들의 살해 현장 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정확하게 그 감정을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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