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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14. 2017

프레셔스

칠흑 속에서 빛이 피어나는 과정

 아버지의 성폭행으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프레셔스, 엄마는 그런 프레셔스를 방치하다 못해 폭행도 일삼으며 그녀를 더 가혹하게 대합니다. 프레셔스의 두 번째 임신을 알게 된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프레셔스가 입을 떼진 않았지만 가정에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프레셔스의 집으로 찾아가는데요. 프레셔스와 그녀의 첫 째 딸 몽고의 가장이란 이름으로 보조금을 타서 생활하는 엄마는 보조금이 끊길까 선생님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지만, 선생님은 현관 너머에서 프레셔스에게 대안학교 ‘이치원 티치원’을 소개합니다. 한 줄기 빛도 스미지 않는 그녀의 인생에 이 한 마디의 희망이 그녀를 빛으로 이끌게 됩니다.    



  

- 칠흑 속에서 빛이 피어나는 과정

 다음날, 프레셔스는 ‘이치원 티치원’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레인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프레셔스는 레인 선생님과 반 친구들의 지지와 사랑으로 자신의 가치를 조금씩 되찾게 됩니다. 

 그 더딘 과정 중에서 가장 아프고 격렬했던 부분이 ‘엄마’를 중심으로 한 불우한 가정으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실은 그녀가 대안학교라는 것을 선택한 것부터가 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의 믿음과 인정으로 인한 자기 사랑 그리고 불행의 틀로서의 가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엄마의 생활을 지탱해주고 있는 ‘보조금’을 못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안 엄마가 그녀에게 모진 말을 퍼붓자 프레셔스는 다시금 공상에 빠집니다.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들 앞에서 공상에 빠지곤 하는데요. 공상의 이미지들은 보통 그녀와 엄마가 바라보고 있는 TV의 행복한 이미지들이 대부분입니다. 무대에 선다던가, 멋진 남자친구가 그녀를 찾아온다던가 하는 이미지들은 대중문화의 화려함이 가진 공허만큼이나 허황된 공상으로 비참한 현실의 불안한 도피처입니다. 그녀가 둘째 아들인 압둘을 낳고, 레인 선생님과 주변 인물들의 사랑으로 현실에서의 희망을 보자 그 공상들은 잠시 그녀에게서 멀어집니다. 

 둘째 압둘을 낳고 집으로 돌아온 프레셔스에게 엄마는 자신의 남편의 아이를 낳은 딸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런 엄마의 폭력을 묵묵히 참기만 했던 프레셔스는 압둘이 폭력에 노출되자 참았던 화를 터뜨리는데요. 프레셔스는 엄마의 삶이나 다름없는 TV를 내동댕이쳐버립니다. 둘의 싸움 끝에 프레셔스는 집을 압둘을 데리고 집을 나오게 됩니다. 이때 레인 선생님이 그녀를 적극 도와주는데요. 보호소에 가기 전 프레셔스와 압둘은 선생님의 집에서 잠시 머무릅니다. 

 프레셔스는 그곳에서 레인 선생님이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엄마로부터 ‘호모’에 대해 편견적인 시선만 배웠던 프레셔스는 엄마의 말을 자신의 말로 반박하며 레인 선생님이 준 사랑을 바탕으로 ‘호모’라는 단어를 사랑과 존경으로 새로 써내려 갑니다. 이렇듯 영화는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굴레 같은 현실을 비추면서, 그들을 빛으로 이끄는 사람들을 다른 소수자, 소외된 사람들로 그립니다. 그들의 유대는 사회적 위치가 주는 동일한 감정선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진심’을 나누는 진정한 유대가 됩니다. 이는 복지사가 주려했던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적인 복지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복지사 웨이즈도 프레셔스의 상황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그녀가 처리해야할 수많은 파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또한 보조금을 주거나 끊을 수 있는, 당사자의 상황과 동떨어진 직업을 권고할 수 있는 심판하는 위치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상하관계로 인해 프레셔스와 엄마는 각자의 이유로 도와주려고 존재하는 복지사에게 그들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복지사 웨이즈는 엄마와 프레셔스 둘 모두가 다시는 복지사를 보지 않을 생각으로 만난 3자 대면에서 그들이 에둘러 말했던 진실을 듣고서 눈물을 흘립니다. 

보호소에서 압둘과 생활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은 프레셔스에게 엄마가 찾아와 또 다른 비극을 그녀에게 전하는데요. 그 거대한 비극 앞에서 무너졌던 그녀를 빛으로 인도한 것은 다시 레인 선생님이었지만, 보다 큰 삶에 대한 희망이 그녀를 터널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합니다. 프레셔스는 영화 중간에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어둠 속을 걷던 시절에, 그들을 그 터널 밖으로 이끈 것은 그들 안의 빛이었을 것이라는 독백을 하는데요. 영화 말미에는 그녀도 그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자신이 빛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빨강으로 이어지는 희망의 끈

 영화는 처음부터 프레셔스가 자주 걸치는 빨간 스카프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그리고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빨간 귀고리를 한 프레셔스에게 이 스카프를 전해주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렇듯 빨간 스카프는 프레셔스의 가치의 상징이자, 그녀에게 전해준 사랑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붉은 현실을 그녀는 ‘흡혈귀들’이라고 말합니다. 

 복지사에게 자신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흡혈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에게도 같은 흡혈귀라고 말하는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그곳에도 흡혈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기력하게 보조금만 타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가정과 이웃 가정을 비유한 것인데요.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흡혈귀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웃 소녀에게 자신의 빨간 스카프를 주며 희망을 전합니다. 


     

 <프레셔스>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비추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과정이 결코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줍니다. 엄마보다 더 안식처와 빛이 되어 주었던 레인 선생님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 소외된 자들, 사람들 간의 연대가 그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도록 도왔는데요. 하나의 영화로 부모, 스승, 연대와 복지 그리고 삶과 희망의 의미들에 대해 한꺼번에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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