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즈옹 May 18. 2017

서울역

타인들의 도시, 서울의 부유물들

 영화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서울역>은 재난의 시작을 다루며 공간과 사건의 규모는 <부산행> 보다 작지만, 그 안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날 선 시선들은 보다 밀도 있고 현실적이다. 이렇듯 <서울역>은 ‘좀비’라는 서양에서 넘어온 재앙에 철저히 한국적인 사안, 감성들을 녹여 ‘한국 영화‘로 만들어 낸다.      




- 타인들의 도시, 서울의 부유물들

 영화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무언가에 물려 비틀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던 청년은 할아버지를 도우려다 악취로 노숙자라는 것을 알자, 주었던 연민을 거둔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서울행>은 ‘좀비’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타인들의 도시 서울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노숙자 그리고 가출 청소년 혜선과 기웅 등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시 속에서 정해진 거처 없이 부유하는 그들에게 서울 사람들은 유난히 더 매정하다. 영화 속 지하철에는 ‘누구나 원하는 오피스텔, 불노소득의 꿈’이라는 광고들이 곳곳에 붙어있다. 한 노숙자가 그 광고판 안에서 숨겨둔 자신의 집인 담요를 꺼내는 풍자도 등장한다. 영화 속 사람들이나 우리 모두, 같은 불노소득의 현장을 두고 누구는 꿈을 이룬 사람으로 누구는 무관심과 무시의 대상으로 대한다. 그리고 <서울역>에서는 그 그늘진 무시의 현장에서 재앙이 시작된다. 영화는 돈이 드러내는 불평등을 집이 없는 사람들로 세분하여 보여준다. 이 과격하게 좁아진 초점에서도 의미가 큰 빈틈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는 이에게 처연한 감정을 남긴다.

 노숙자 할아버지를 첫 감염자로 시작된 좀비 사태는 ‘노숙자들의 폭동’으로 전파된다. 불특정 다수로 시작된 좀비의 재앙들을 많이 접했던 나에게는 특정 계층을 지목한 이 영화가 신선했다. 감염자-피감염자가 아니라 노숙자, 폭도가 아니라며 자신을 계속 남과 구분 지으며 서로를 밀어내는 사람들은 좀비들이 날뛰는 현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라며 재앙을 눈앞으로 바짝 들이민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초반에 등장한 ‘독재자’와 후반에 등장한 ‘빨갱이’라는 단어였다. ‘독재자-빨갱이-폭도-진압’이 만났을 때, 떠오르는 역사적 사례들이 겹쳐지면서 지극히 한국적인 문제들로서 등장한다. 버스로 막힌 바리게이트를 앞에 두고 국가에 헌신했었다던 두 노인의 넋두리와 말로는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던 국가는 국민에게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집’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거처 없이 도시를 부유하는 이들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나는 미약하게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는 불신의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사람’들을 찾는다. 주인공 혜선 곁에는 돈으로 인해 자신마저 잃게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함께 있다는 기용이의 전화는 그녀를 삶의 희망으로 이끈다. 안식처로서의 집이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무형의 형태로 끊어질 듯 미약하게 남아있는 사람을 향한 믿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레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