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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n 10. 2019

젠더의 모양

<젠더블렌드>, 소피 드로스, 2017

  제 19회 한국 퀴어영화제의 폐막작은 소피 드로스 감독의 <젠더블렌드>였다. 영화 <젠더블렌드>는 젠더가 성별을 따라 정해지지 않은, 젠더가 구분하는 남과 여의 이분법 사이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젠더 퀴어 중에서 젠더 플루이드들 5인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젠더 플루이드가 젠더의 유동성을 담은 개념이지만 이들은 그 단어마저도 자신들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젠더의 모양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를 따라가 보면 그 모습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분화 된 젠더 사이에서 이들이 겪는 고충은 수도 없이 많다. 화장실이나 수영장 같은 ‘기능적’인 공간을 가는 것부터 그들은 젠더를 의심받고 시험받고 확인받으려는 눈총에 시달린다. ‘이해’하기 위해 나누는 짧은 대화들 사이에서도 그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네일 케어를 받으러 간 네일숍에서 네일숍 직원이 젠더 플루이드인 ‘라숀’에게 ‘게이인데 트랜스젠더는 아니라는거죠?’라는 질문에  라숀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그냥 자신은 ‘젠더 퀴어’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해’의 폭이 그들의 젠더만큼 넓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들은 여자나 남자, 더 나아가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라는 몇 되지 않는 선택지 사이에서 정의하기 위해 애쓴다. 선으로 그어진 젠더의 세계에서 그들을 정의할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세계를 넓혀야 할 시간이다. 

  영화 속에서 젠더 플루이드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어딘가 속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었다고 말한다. 젠더의 영역 밖에서도 그 일은 삶을 고달프게 하는 강박 중 하나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웠던 생애 주기에 맞춰서 살기 위해 전전긍긍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고민하고 움직여야 한다. 끝내 어딘가에 속해야만 끝날 수 있는, 혹은 그 밖에 선 개인의 확고한 가치관이 정해져야만 그 일은 끝이 난다.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 ‘아이를 가지지 않는 이유’라는 정말 개인적인 선택의 회고를 담은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개인마다 고뇌의 분량은 책 한 권 이상일 것이며, 그저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고 말면 될 것이 매번 다른 사람의 다른 이야기로 출간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개인사에 관심이 많은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시스젠더들 사이에서 사회가 틀을 씌운 개인이 겪는 답답한 심정을 공감할만한 주제를 머리 굴려 나름 겨우 찾아내본 것이다. 이 또한 몰이해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중간 중간 살구색 배경에 ‘살’이 맞닿는 모습을 몽환적인 연기와 섞어 보여준다. 신체는 개인의 존재의 말단이다. 정신이 어떤 형태를 띠던 우리는 신체를 가지고 현재의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리고 흩어지는 연기는 아마 젠더 플루이드가 자신의 젠더를 표현하면서 그린 ‘구름’일 것이다. 구름은 수증기들이 모여 형태를 가진 것이다. 젠더라는 공간을 기체의 형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자신’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 그렇게 자신을 정의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할 수 있다. 

  시스젠더 혹은 소수자이지만 경계가 명확한 소수자들은 그들을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만큼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다면 젠더라는 선(線)의 모양이 차츰 허물어지고 흩어져 각자 ‘나’라는 젠더를 가지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 제 19회 한국 퀴어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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