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즈옹 Aug 18. 2019

야성과 온기 그리고 시간

<이타미 준의 바다>, 정다운, 2019


  영화는 이타미 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방금 비가 맑게 씻어낸 듯한 숲 한 구석 비춘다. 그 곳에는 거미집이 걸려 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원초적인 동시에 완전한 건축물은 물방울을 구슬처럼 매달고 반짝거리고 있다. 자연 속에서 지어져 자연과 함께 숨 쉬는 작은 건축물. 영화는 자연을 걸으며 이타미 준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물을 머금은 숲을 가로지르는 개울을 따라 한 소년이 걷는다. 그렇게 물을 따라 숲을 걷던 소년이 다다른 곳은 탁 트인 바다다. 소년은 바다를 바라보고, 관객들도 소년의 뒷모습을 따라 먼 바다를 본다. 바다는 물이 방울방울 자연히 모여 만들어낸 웅장한 풍경이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건축가 이타미 준이 건축물을 지으며 꿈꿨던 야성과 온기, 시간의 집합을 ‘바다’라는 풍경으로 응축해 보여준다.     



 



- 영화로 ‘건축’을 보는 일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예술 현장들을 대신 전달해왔다. 미술, 음악,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 여러 장르들이 녹화되어 영화관에서 대중들을 만났다. 예술 현장이 영화로 대체되는 과정은 3차원의 현장을 평면화시키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장르들은 영화라는 장르를 만나 추가적인 시너지를 내지 못한다. 평면화되고 간소화되면서 대중성을 얻은 것이 그들의 최대치이다. 반면, 건축을 영화로 보는 일은 장르의 공간감을 잃는 대신 시간과 감각을 첨가하여 영화 장르와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건축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건축을 일부만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찾아간 계절에 따라, 그 날의 날씨와 내가 찾아간 시간대에 따라서 ‘나’는 그 건물의 ‘하나의 풍경’만 경험할 수 있다. 건축물이 얼마나 오픈되어 있는지도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건물 외부 혹은 내부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건축을 면밀하게 담아낸 영화를 만나는 것은 건축을 바라보는 감각을 열어준다. 영화는 건물의 다양한 시간과 계절을 보여주고, 그 건축물의 안과 밖을 동시에 대신 감각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부감을 더 너른 풍경과 호흡하는 건물을 감상할 수 있다. 단지 시각적인 것만이 건축의 아름다움은 아니다. 영화를 통해서라면 비가 건물의 돌과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섞이는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다. 

  건축은 시간을 버티며 성숙해간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버티며 서있는 건축물을 감상하기에 시간을 압축할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체이다. 영화를 통해 건축을 보는 일은 어쩌면 건물에 사는 것 외에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 야성과 온기 그리고 시간     


  이타미 준의 작품은 자연과 호흡한다. 그는 자연의 야성을 건축물에 담고자 했다. 일률적으로 직조되는 도시 속에서 자연의 울퉁불퉁함을 이식하려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재료들을 탐색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재료 본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업의 끝은 재료의 의미와 시간을 담아내는 일이었다. 서울대 도서관이 자리를 옮기며 허물어지면서 남긴 벽돌은 동경으로 옮겨져 새롭게 태어난다. 

  이타미 준은 ‘유동룡’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재일교포이다. 재일교포이기 때문에 작업이 들어오지 않고 건축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이 심해지자 그는 이름을 ‘이타미 준’으로 바꾼다. 이타미 국제공항에서 따온 ‘이타미’와 절친했던 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준’으로 만든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이 이름은 재일교포라는 신분으로 일본이나 한국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살던 그가 자신을 국제성을 띈 하나의 개인으로 정의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는 그 행동을 함에 있어서 모국인 ‘한국’을 잃지 않았다. 앞서 이타미 준이 서울의 벽돌을 동경에 심은 것처럼, 그는 한국의 요소들을 국제적인 감각에 심어 피워냈다. 30대의 이타미 준은 한국을 찾아 자신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했으며 그 해답을 건축으로 대신했다. 거북선의 모양을 본 뜬 건축물의 웅장한 외형에서부터 한국과 일본의 전통 종이가 반씩 발려져 있는 창호까지 그는 한국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건축에 오롯이 담아냈다. 

  이타미 준은 사람의 체온이 담긴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다. 그가 한국성을 이으려고 했던 것 또한 자신의 체온을 담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타미 준의 건물에는 한국성 외에도 이타미 준 개인의 절대적인 고독, 삶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빛의 형태로 담겨져 있다. 그는 어두운 곳에 작은 창을 뚫고 그곳으로 햇빛을 내린다. 그 빛은 시간을 따라 흐르며 어둠 속을 온화하게 밝힌다. 어둠을 밝히는 자연의 빛, 이것이 이타미 준이 자신의 건물에 담고 싶은 사람의 온기였을 것이다. 

  그가 건축에 담으려고 했던 자연의 야성, 사람의 체온은 ‘시간’을 만나 무르익는다. 영화 속에서 이타미 준의 작품 중에서도 ‘수, 풍, 석’ 미술관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매번 그 모습은 새롭다. 자연이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꾸듯, 이 작품들도 자연을 닮아 시간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대로 콜렉션 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이 작품들은 자연에 위배되지 않고 풍경이 되어 오롯이 서 있다. 이타미 준은 ‘시간의 맛’을 아는 건축가였다. 보통의 건축물들이 시간을 이겨내고 서있기를 희망하며 쌓아올려지는 반면, 이타미 준은 소재에 적극적으로 시간을 담으려고 했다. 시간을 수용하는 자세는 그와 그의 작품을 더욱더 자연에 가깝게 만들었다. 시간을 입은 그의 작품은 매 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한다. 자연이 그렇듯이. 

  영화는 ‘설계는 신체에서 나오는 행위’이기에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갔던 한 사람, 이타미 준이라는 건축의 역사를 영화가 시작했던 지점인 바다에서 끝맺는다. 이번에는 소년이 아닌 이타미 준으로 분한 노인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소년이 자라난 시간만큼, 영화가 훑어낸 이타미 준의 시간만큼 바다의 풍경도 더 깊어져 있다. 이타미 준이 자신의 철학으로 세워낸 건물들과 그 건물들의 시간, 그것을 통해 이타미 준이라는 사람과 연결된 ‘사람’들이 이 바다의 풍경에 깊이를 만든다. 이타미 준이 건물에 담아낸 자연의 야성, 사람의 체온 그리고 시간은 끝내 사람을 향한다. 그의 건축과 함께한 사람들, 영화를 보며 함께 그의 삶을 체감했던 관객들에게까지도. 그렇게 건축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다시 건축이 되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버티고 다시 사람들에게 가 닿는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259


매거진의 이전글 [15th JIMFF] 비가 내리고 영화가 흐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