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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Sep 01. 2019

시대를 앓는 소녀

<벌새> , 김보라, 2019


1994년, ‘은희’(박지후)는 중학교 2학년이다. 그 시절 여름, 은희는 말간 도화지 같았다. 은희는 이제 막 눈을 떠 시대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시대는 그런 은희에게 자신의 불온함을 하나씩 비치기 시작한다. 영화 <벌새>는 1994년 이제 막 시대에 눈을 뜬 은희가 어떻게 시대를 앓고 성장해나가는지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늦은 밤, 은희의 언니가 학원을 빠졌다고 아빠에게 혼나고 있다. 아빠로부터 ‘년’이라는 비속어가 섞인 폭력적인 언사를 들으며 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그 때 은희의 외삼촌이 술에 취한 채로 은희 엄마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은희네 집을 찾는다. 외삼촌의 등장으로 폭력은 일단락되고 잠시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의 어색한 대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은희 엄마가 깎아놓은 사과 한 조각도 들지 않은 채로 삼촌은 현관으로 나선다. 은희는 삼촌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드린다. 그리고 “몇 살이냐”고 묻는 삼촌의 질문에 짧게 답한다. 삼촌은 별 말없이 이내 문 밖으로 사라진다. 


이때, 가족들이 문을 향해 서 있는 순서는 앞으로 있을 삶과 시대가 주는 상흔과의 거리를 보여준다. 방금 현관문을 열어준 은희를 시작으로 엄마, 언니를 거쳐 아빠를 지나 오빠가 제일 집 안쪽에 자리한다. 은희의 오빠는 시대와 가장 거리가 멀다. 그는 은희만큼 시대를 감각하지 못한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아빠의 총애와 기대를 받으며 자란 그는 시대에서 멀어진 딱 그만큼 좁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은희의 오빠는 부모의 다툼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은희에게는 가장 큰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은희의 오빠의 세계는 집 그리고 남성의 세계 둘 뿐이다. 


반면, 은희가 응시하는 세계는 보다 다양하다. 남자친구, 친구,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 후배와의 관계가 있고 그리고 은희의 삶의 방향키를 쥐고 은희의 시야를 틔워준 ‘영지’(김새벽) 선생님과의 관계도 있다. 은희는 유동하는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느린 속도로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는 시대가 궁금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인 엄마는 은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은희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른다. 실은 은희가 집을 잘못 찾아간 것이었다. 한 층을 올라가 문을 두드리자 엄마가 문을 열고 나온다. 은희는 자신이 애타게 엄마를 찾은 일에 대한 서글픈 마음이 아직 조금 서려있지만, 엄마는 은희보다는 은희가 사온 대파의 상태에 더 관심이 많다. 이렇듯 엄마는 은희와 묘하게 어긋나있다. 훗날 모녀의 어긋남은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은희는 항상 애타게 엄마를 부르고 있지만, 엄마는 살아가기에 바빠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남겨진 상실의 상흔을 홀로 핥느라 은희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대를 직시하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은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받아준 것은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이다. 그녀는 세계의 표면을 보고 이제 막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된 은희에게 세계의 깊은 곳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연결”에 대한 것이다. 사는 일은 영지 선생님에게도 알다가도 모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은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인연의 깊이이다. 은희의 관계는 이제 막 가정과 학교를 넘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은희가 맺는 관계의 수가 많아지고 복잡해질수록 은희에게 필요한 것은 뿌리이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뿌리가 맞닿은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폭력 앞에 무너져 내릴 때, 버틸 수 있는 삶의 뿌리 또한 은희에게 전한다. 


개인이 시대에 불온함에 맞아 세차게 흔들릴 때 삶을 붙들어 줄 뿌리로 영지 선생님은 ‘손가락’을 이야기 한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지 선생님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손가락’이다. 그렇기에 영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불러준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밤”으로 시작하는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는 영지 선생님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을 담은 노래이다. 아마 그녀가 앓는 시대가 있다면, 그 마음은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은희에겐 혹이 있다. 귀 밑에 만져지는 멍울을 남자친구는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는 곧바로 혹임을 알아차린다. 영화 속에서 몇 없는 남성들은 모두 수직적이며 각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빠는 가장으로 군림하고 담임선생님도 ‘노래방 대신 대학 간다’를 외치게 시키며 날라리를 색출하는 사람이며 오빠는 폭력을 행사하며 육체적 우위를,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며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들은 시대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감정적으로 시대를 민감하게 읽어내지는 못한다. 은희의 혹을 지나쳤던 것처럼, 폭력을 지나치고, 사랑을 지나치고, 유대를 지나친다. 은희의 혹은 이들이 움직이는 시대의 폭력과 무관심, 단절이 차곡차곡 쌓여 자라난다. 은희에게서 혹이 떨어져 나가는 일은 일방적으로 시대를 받아들이며, 시대를 앓았던 한 사람이 시대의 혹을 떼어내고 보다 적극적으로 시대를 읽어나가겠다는 의미다. 혹을 떼어낸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 찾아온다. 그리고 은희에게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 있지마” 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시대의 거대한 움직임은 아직 어린 은희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과 같다. 그리고 그 벽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치 벼락처럼 내리쳐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다. 단단하고 커다란 벽 앞에서 은희는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상실을 마주한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다. 

은희의 언니는 성수대교를 타고 강남에서 강북으로 학교를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은희를 비롯한 은희네 가족은 운이 나빴다면,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는 일상을 잃을 뻔 했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 날의 저녁식사 시간에 오빠가 눈물을 터뜨린다. 이렇게 은희의 오빠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죽음 앞에서 삶의 불온함을 통렬하게 체감한다. 은희가 매 순간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하며 이해해 나갔던 것과는 다르게, 가장 뒤늦게 가장 아픈 방식으로. 


하지만 은희에게도 성수대교의 참사는 또 하나의 거대한 의문을 던진다. 영지 선생님이 참사가 일어난 그 시간, 그 다리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은희는 자신이 준 책 선물에 화답하여 영지 선생님이 스케치북과 함께 보낸 소포를 받는다. 은희는 한문학원을 관두어 더 이상 학원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영지 선생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 떡을 들고 소포에 적힌 주소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 곳에는 영지 선생님은 없었다. 성수대교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지 선생님의 시간은 은희가 소포를 받으면서 끝이 났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방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그 손끝에서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말했던 생(生)을 본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에게 묻는다.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하지만 그 질문이 적힌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못하고, 영지 선생님이 살아 있을 때 은희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그 대답을 대신한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에 영지 선생님이 내린 단 하나의 완전한 답은 ‘유대’이다. 마음의 뿌리를 맞잡아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을 유대. 


은희는 영지 선생님이 사라진 한강변에 서서 오래토록 영지 선생님을 가슴에 새긴다. 일상은 상실을 묻고 다시금 흐른다. 하지만 은희는 가끔 출렁이는 시대의 움직임에 전보다는 덜 흔들릴 것이다.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유대의 뿌리를 내린 은희는 더 이상 시대를 앓는 것이 아닌, 더 오랫동안 현상을 응시하고 감각하고, 읽어나가며 시대를 뚫고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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