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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25. 2017

인 투 더 와일드

이 땅에서 가장 먼 곳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가족과의 연락을 끊은 채, 여행을 떠난다. 자본과 소비주의 사회로부터 탈출했다고 말하는 그는 ‘알렉산더 슈퍼트램프’라는 유치하지만 ‘주어진’ 이름을 벗어 던지며, 사회의 자궁 속에서 자연으로 첫 숨을 들이킨다. 

 말 그대로 자신이 발 디뎠던 사회라는 땅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는 알렉산더 슈퍼트램프의 청춘은 그가 만난 군상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하고 찬란하게 타오른다.      




- 이 땅에서 가장 먼 곳으로

 영화는 ‘알렉산더 슈퍼트램프’의 마법의 버스에서의 현재, 지나온 여정, 그리고 과거를 교차해 보여준다. 거기에 여동생의 나레이션까지 섞여 영화는 크리스토퍼의 젊음이라는 찰나를 이야기로 가득 채운다. 

 ‘알렉산더 슈퍼트램프’는 수많은 것으로부터 떠나왔다고 이야기 한다. 추상적 개념과 아이디어의 세계, 안전 불감, 부모, 물질과잉의 사회로부터 떠난 그는 길 위에서 부모들을 만난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자란 ‘알렉산더 슈퍼트램프’에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에서 길로 이끄는 부모였다. 그들은 불안하게 빛나는 젊음의 눈동자를 직시하고 위로하고 또 다음 길로 인도하였다. 

 히피 부부는 ‘알렉산더 슈퍼트램프’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 또한 알렉스와 같은 탕자를 둔 부모였으며, 그 젖은 마음으로 알렉스를 만나는 내내 마음깊이 사랑하고 존중한다. 햇볕아래서 느슨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부모에서부터 사회까지 모든 것의 진실을 바라는 알렉스의 불의를 쏘아보는 정의의 눈에서 부모만은 공정하게 볼 것을 부드럽게 제시한다. 알렉스에게 부모란 신처럼 군림한 아버지와 불온한 가정을 가리려고만 했던 위선적인 어머니의 집합이었다. 알렉스는 불행을 위선으로 가리는 가정사를 모순 덩어리인 사회의 일부로 보았지만, 히피 부부는 그 색안경에서 ‘부모’만은 구해내고자 한다. 사회 속 수많은 불의 안에서 유일한 인연 하나는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계속해서 자연으로 나아간다. 뜨겁고 불온한 젊음을 거칠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에 담금질 한다. 그 속에서 그는 그 순간, 그 시간과 그 자리에 존재함을 만끽하는 ‘자유’의 달콤함을 마음껏 맛본다. 그가 사회 속에서 달궈온 뜨거운 불은 자연 속에서 부딪치고 식으며 때를 씻어내고 지혜를 남긴다. 

 알레스카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그는 가족을 잃은 한 노인을 만난다. 계속해서 자연으로 달음질치는 알렉스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노인,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서로를 세상으로 이끈다. 알렉스가 새로운 경험을 독려하며 노인을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면, 노인은 ‘용서’라는 깊은 사랑의 의미를 전하며 돌아올 길 없이 땅에서 멀어지는 알렉스에게 돌아갈 ‘사랑’의 공간으로서의 세상을 선물한다. 알렉스의 여정마다 길 위의 부모들은 그에게 세상의 온기와 지혜를 전해준다. 이는 언제나 떠나가기만 하는 청춘에 대한 그들의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에서 온 것일 것이다. 

 영화는 알렉스가 알레스카로 가는 길에 만난 버려진 버스에서 보낸 마지막 9주를 함께 그려낸다. 알레스카로 가지 못하고 자연에 갇혀 보낸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우리는 여행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스러져 버린 청춘을 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궤도대로 날아가 가장 밝게 빛난 청춘의 불꽃을 보게 된다. 그와 함께 먼 길을 떠나온 우리도 자연 속 자유에서 드디어 고난과 고독을 마주하게 된다. 알렉스는 그 끝에서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이 현실이 된다’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본래의 이름을 찾아 영원히 청춘으로 남아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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