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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Sep 10. 2017

시인의 사랑

빈 가슴에 불어온 한 사람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기입니다. 또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다. 시인인 택기는 세상을 한 올 한 올 아름답게 빗겨본다. 하지만 돈도 없고, 정자도 없는 현실의 무능 아래서 그는 그저 찌질한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의 아내 강순은 억척스럽게 현실을 살아내며, 무능한 시인이지만 맑은 그를 아낌없이 사랑한다. 그녀가 하고 싶은 ‘남들 하는 것’ 중에 ‘아이를 가지는 일’이 생기면서 그녀는 시인을 현실을 속으로 계속해서 보챈다. 

 강순에 의해 현실로 질질 끌려 나가는 무력해진 택기에게 ‘함부로 아름다운’ 존재가 들어온다. 순수하면서도 거칠고 불안정한 세윤은 택기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살고 있다. 택기는 그렇게 세윤의 세상에 발을 들인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세상의 아름다움은 알지만 비애는 몰랐던 시인 택기가 현실의 찬 바람을 홀로 맞고 있는 소년을 만나게 되며 마음에 이는 파도를 그려낸다. 그 파도는 처음에는 발목을 살랑이며 적셨지만, 금새, 그의 턱밑까지 차올라 그를 사랑이라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 빈 가슴에 불어온 한 사람 

 돈도 없고, 정자도 없는 무능한 존재로 강순의 짐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택기. 그에게 아내는 든든한 가장이자 동반자이다. 아내 강순 또한 그를 면박을 주다가도 헌신적으로 사랑한다. 강순에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삼켜버릴 듯이, 처절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택기에게 사랑은 편안한 것, 혹은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주어지는 사랑만 받아온, 그리고 상처받기 두려워 ‘시’라는 이름 뒤에서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이다. 세윤에 대한 사랑도 시의 대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달콤한 맛에 이끌려 찾아간 도넛가게. 그곳에 언제나처럼 순수하고 바른 모습으로 서비스하던 아르바이트 생 세윤이 화장실에서 여자친구와 거칠게 욕망을 나누는 것을 본 순간, 택기는 그가 찾던 아름다움의 이면을 발견한다. 순수하면서도 거칠고 불온한 그를 시적 대상으로서 탐구해 나간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와 생활고로 인해 돈에 눈이 먼 어머니, 그 사이에서 자란 세윤은 남이 자신에게 베푸는 동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존과 가난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싸우며 살아가는 세윤에게 택기는, 유일하게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봐주는 한 사람이다. 택기와 세윤이 ‘죽음’을 주제로 하나의 시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은, 두 사람이 죽음이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심연적인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단 한 사람’이 되어간다.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무능한 존재였던 택기가 누군가에게 대체 불가능한 ‘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확신한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세윤을 향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차가운 현실의 날들을 잘 읽어내는 세윤은 택기의 아내 강순이 임신을 했단 이야기를 듣고서 차갑게 택기를 돌아선다. 제주에서 나고 제주에서 져버릴 두 사람이 품었던 디딘 땅에서의 도피라는 희망은 결국 섬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훗날 시집을 낸 택기와 제주시 소속 택배 배달원이 된 세윤은 우연히 조우한다. 그 때 택기는 차갑게 돌아선 세윤에게 ‘널 이용했다’며 차가운 말을 되돌려주지만, 세윤은 그에게 ‘함께 떠나자’라고 다시 그를 흔들어 놓는다. 택기가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시를 쓰며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고 마침표를 찍고서 흘리는 눈물은 세윤이라는 사람이 할퀴고 간 자리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이 또한 언젠가 일상에 묻혀 아물어 버릴 것을 슬퍼하는 눈물이다. 그렇게 한 남자의 빈 가슴에 한 사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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