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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an 19. 2018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오직 나라서, 단지 너라서.

 2004년, 지브리스튜디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똑단발머리 소년 하쿠에 이어 또 다른 2D 남친을 창조하였다. 찰랑이는 단발과 하늘거리는 몸짓, 그리고 누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미청년 ‘하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찾아다녔잖아”라며 무심한 소피의 하루를 어깨 뒤에서 깨운 것처럼 그는 그렇게 모두의 마음에 날아 들어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울을 찾는 황야의 마녀의 저주에 걸려 노인이 된 ‘소피’가 황야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마법 같은 하루하루가 펼쳐진다. 여전히 노인이 된 소피를 등 뒤에서 부르는 하울의 목소리와 함께.  



- 오직 나라서

 소피는 마을에서 작은 모자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동생 레티 마저도 “언니가 할 일은 언니가 정하는 거야!”라고 눌러서 말하지만 소피는 흘러가는 자신의 젊은 날에는 무심하다. 그저 장녀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소피는 자신의 인생을 작은 모자가게에 맡겨 놓은 채로 세월에 몸을 맡기고 있다. 

 황야의 마녀는 자신을 닫은 채로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정해 놓은 채로 살아가는 소피 안의 노인을 본 것일까. 마녀는 소피에게 ‘늙음’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한 순간 노인이 된 소피는 나무처럼 굳어버린 몸을 이끌고 처음으로 고정된 삶의 궤도 밖으로 걸어 나간다. 

 젊음이라는 틀마저 벗어버린 소피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진다. 몸이 굳어지고 나서야 소피의 마음은 더 뜨거워진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해진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노인과 소녀를 오가는 소피에게 이제 자신이 자신을 규정하는 ‘할머니’라는 틀만이 남게 된다. 성 안의 누구도 소피에게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른다. 젊음을 잃고서 찾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돌고 돌아 다시 외연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긴 과정에는 외연 안에 숨 쉬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 단지 너라서

 하울은 도망치고 있다. 황야의 마녀, 국가 그리고 추(醜)함에게서도. 그는 잡동사니를 끌어 모아 자신의 움직이는 성을 만들었다. 전능한 힘과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그는 적을 두지 않은 채 도망치고 방황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소피가 찾아온다. 그녀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그의 삶을 정돈한다. 그리고 어디에 멈출지 몰라 계속해서 걷고 있는 그의 마음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든다. 그렇게 불쑥 하울을 찾아온 소피는 결국 하울이 높게 쌓은 성을 부수고 하울의 불안한 마음과 만난다. 반지에서 새어나온 빛처럼 올곧게 하울을 향해 빛나는 소피의 마음은 마왕이라는 어둠에 침잠해 있던 그를 건져 올린다. 먼 시간을 돌아 만난 소피와 하울 두 사람은 수많은 허울 속에서 서로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속에 빛나는 단 하나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지금껏 하울은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목적이 없는 전쟁 속에서 그는 전쟁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전쟁 자체에 맞선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한편으로는 투쟁하던 그는 소피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라는 구심을 찾는다. 그렇게 하울은 ‘지키기 위해’ 전쟁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 날아오르는 성

 영화 속에서 전쟁은 멀리서 천천히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다가온다. 출정을 앞둔 군인들의 파티, 하늘에서 쏟아지는 선전물, 그리고 끝내 포탄이 되어 소피의 모자가게로 날아든다. 왕궁으로 쏟아지는 포탄들을 마법으로 다른 마을로 떨어뜨린다는 설리만과 국왕의 대화에서처럼 전쟁은 국가에서 개인들에게로 포탄을 쏟아낸다. 하울은 잔인한 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분투했고, 소피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홀로 전쟁에 맞선다. 

 전쟁이 늘 그랬듯 전쟁이 남긴 처참함과는 전혀 다른 고상한 사람들의 말 몇 마디로 하무하게 끝나고 나서, 하울의 성은 날아오른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동안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맞섰다. 장녀로서의 보통의 삶에 묻힌 진정한 나를 찾고, 아름다움과 젊음이라는 허울을 벗고 사랑을 피웠다. 그리고 성이 날아오르면서 개인의 행복과 대립하는 국가의 관계가 끊어진다. 마음의 무거움을 알게 된 하울과 자신의 모습을 되찾은 소피는 각자의 사연으로 모인 개인들(캘시퍼, 마르크르, 황야의 마녀, 힌)과 함께 디딘 땅으로 그들을 규정짓던 국가로부터 날아간다.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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